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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감정에 반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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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동쪽 바다’라고 하면 어디인지 감이 오시는지. 외국인들은 동해(East Sea) 영문 표기에 고개를 갸웃한다. 영어신문 시절, 동해·일본해 병기를 지시한 에디터들은 항의 전화에 지친 내게 “어디의 동쪽인지 모르는 독자들도 배려해야 해”라고 잘라 말했다. 독도·다케시마(竹島)도 병기한 그들이 흔들렸던 적은 딱 한 번. 어느 중년 여성이 반일 시위 중 자기 새끼손가락을 자른 후 “독도는 한국 땅”이라 절규했을 때다. 그들은 “이분들, 뉴스룸으로 쳐들어오는 거 아냐”라며 “한국은 왜 그리 감정적이냐”고 물었다.

 한국 역사를 몰라서 그렇다고? 착각이다. 분쟁지역을 누빈 베테랑 기자들인 이들은 을사늑약 서명 연도는 몰라도 한·일 갈등의 폭발력은 본능으로 감지했다. “감정적으로 나오면 한국이 지는 게임”이라는 게 이들의 충고였다.

 헤어지면 끝인 남녀와 달리 한·일은 점 하나 찍는다고 님이 남이 되지 못한다. 나라가 이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손자병법은 “죽기로 싸울 것을 고집하면 적의 유인술에 걸린다”거나 “상대의 모욕적 언사에 쉽게 넘어가면 경거망동한다”고 했다. 일본에 순도 100% 석고대죄만을 죽자 사자 요구하거나, 일상다반사인 일부 우익 정치인의 망언에 핏대를 세우는 데 온 힘을 쏟는다면 우리만 손해다.

 독일 나치에 가족과 유산을 빼앗겼던 유대인 마리아 알트만(1916~2011)이 힌트를 준다. 그의 실화를 다룬 영화 ‘우먼 인 골드’에서 그는 기품과 유머로 상대를 제압한다. 그림을 소유한 오스트리아 정부가 당시 90세이던 그가 자연사하길 기다린다는 소식에 “앞으로 50년은 더 살 테니 걱정 마라”고 웃으며 머리 스타일을 손질하던 그는 8년 법정 싸움 끝에 1억 달러(약 1146억원) 가치의 그림을 환수했다. 집요한 품위와 전략의 승리다.

 지난 16일 일본을 ‘전쟁 가능한 나라’로 만드는 법안 통과를 두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 대한 비난이 쏟아진다. 하지만 히라가나가 적힌 이자카야에서 아사히맥주를 마시며 아베 총리를 욕한다고 해도 법안이 폐기되진 않는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제2의 알트만으로 만들기 위해선 입으론 품위 있게 미소 짓되 속으론 치밀하게 전략을 짜야 한다.

 심리학 박사 프레드 러스킨은 “피해자가 아닌 승리자가 되면 용서라는 평온한 감정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우리 스스로의 평온을 위해 반일 감정이 아닌 용일(用日) 전략으로 승리를 꾀할 때다. 그나저나 ‘동해’ 대신 ‘동한국해’를 제안한다면 매국노로 치부되려나.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