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성조기 함께 달고…재미동포 고교생 '특별한 외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플레이볼."

심판의 우렁찬 구령이 끝나기 무섭게 1번 타자 구경모(15)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2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빠지는 안타. 1루에 안착한 구경모는 두 팔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재미동포 고교야구단의 대통령배 첫 안타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재미동포팀은 16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열린 제49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중앙일보·일간스포츠·대한야구협회 주최, 케이토토 협찬)에서 정읍 인상고와 1회전을 치렀다. 재미동포팀은 1회 초 구경모의 안타와 최원일(17)의 적시타로 선취점을 올렸다. 상대를 한 수 아래로 봤던 인상고 선수들은 당황했다. 재미동포팀의 선발 투수 마현우(17)는 3회까지 4점을 내줬지만 4회부터 7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았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미동포팀은 8회 1사 만루에서 득점에 실패했고, 결국 1-7로 졌다.

경기고에서 야구 선수로 뛰었던 조영균(54) 재미동포팀 감독은 미국에 건너가 리틀야구팀인 LA 라이온즈를 10년 넘게 이끌었다. 조 감독은 "내가 미국에 와 처음 야구를 가르쳤던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됐다. 대통령배 대회에 참가하는 건 선수들에게 큰 추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 감독은 대한야구협회로부터 지난 4월 대통령배 참가 승인을 받아냈다. 한국의 고교생에 해당하는 중등학교 10~12학년을 대상으로 두 차례 트라이아웃을 해서 팀을 꾸렸다. 그러나 메르스 여파로 선수 일부는 한국행을 포기했다. 대회 시작 1주일 전까지 최소 인원인 9명도 확보하지 못했다. 팀 내 유일한 포수인 최규현(16)은 미국 소속팀 경기를 치르고 오느라 15일 오전 한국에 도착했다. 대회 일정이 비로 하루씩 연기되지 않았다면 도착하자마자 뛸 뻔 했다. 그까지 포함해도 재미동포팀은 겨우 10명이다.

부족한 예산도 고민이었다. 항공료와 유니폼 구입비는 자비로 냈고, 4만 달러(약 4600만원)가 넘는 국내 체류비는 교민들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의류 매장을 운영하는 최국현 선수단장도 힘을 보탰다.

주위의 도움도 이어졌다. 전 LG 트윈스 투수코치 임호균(59) 씨의 지도를 받은 뒤 투수들의 기량이 크게 좋아졌다. 지난 10일 한국에 도착한 선수단은 덕수고의 도움으로 좋은 환경에서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스탠퍼드대에서 야구 장학생으로 뛰었던 문민(26) 씨와 덕수고 선수 출신 이주일(42) 씨도 이들을 도왔다.

재미동포 야구단의 유니폼에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함께 붙어 있다. 이 대회의 주인공이자 손님이다. 선수들 대부분은 미국 시민권을 가진 이민 2세다. 대회 참가를 위해 처음으로 한국에 온 선수도 있다.

주장이자 맏형인 유격수 우경용(18)은 팀에서 유일한 12학년(한국의 고교 3학년)이다. 오는 9월 보스턴 칼리지에 입학하는 그는 야구를 계속 할 생각이다. 한국 프로야구에 관심이 많은 그는 "빠르고 짜임새 있는 야구를 펼치는 가 넥센 유니폼을 입어보고 싶다"며 웃었다. 1루수 김기홍(16)의 아버지 김경환(50)씨는 회사 업무를 미루고 아들과 함께 입국했다. 김씨는 "아들보다 내가 더 떨린다. 미국에서 살지만 우리의 조국은 한국이다. 야구가 조국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재미동포팀은 지난 1996년부터 98년까지 3년간 봉황대기 대회에 참가해 3패를 기록했다. 대통령배 참가는 이번이 처음이다. 조 감독은 경기 전날 박상희 대한야구협회 회장과 만나 내년 대통령배 참가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얻었다.

1회전 탈락을 예상한 재미동포팀은 19일 출국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조 감독은 "경기가 다가오자 선수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오늘 아침에는 모두 일찍 일어나 배트를 휘두르며 훈련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실력이 모자라지만 이기고 싶었고, 지더라도 조국에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패배 후 짐을 싸는 선수들 표정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포수 최규현은 "타격이 잘 안 돼서 아쉬웠다. 내년에도 참가해 꼭 이기겠다"고 다짐했다. 조 감독은 "이기지는 못했지만 우리 선수들이 참 잘했다. 희망이 보인다" 고 말했다.

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