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살아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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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으면 병원비도 깎아줘
융통성 있지만 원칙 안 지켜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 이름이 쓰인 아테네 시내의 한 벽 앞에서 거리의 악사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인도주의(人道主義, humanitarianism). 그리스에서 살다 보면 이 단어의 의미를 새삼 느낄 때가 많다.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재력이 부족하거나 지위가 낮다고 그 사람을 무시하는 일은 없다.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것도 한국만큼 심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는 문화가 있다. 예컨대 자녀를 학원에 보낼 때 “학원비가 없다”고 하면 학원 측에서 “나중에 내라”고 하고, 병원에서 진료를 볼 때도 직업이 변변치 않거나 돈이 없으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이는 좋게 표현하면 융통성이지만, 나쁘게 얘기하면 원리원칙을 무시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경제위기의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탈세가 만연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스 기업 중에는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대학교 졸업자를 채용하고도 고등학교 졸업자를 채용한 것처럼 꾸미는 곳이 많다. 노동자의 월급에 비례해 세금을 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임금을 받는 ‘고졸자를 채용했다’고 신고하는 거다. 노동자에게는 대졸 기본임금을 그대로 주기 때문에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다. 탈세는 기업뿐 아니라 개인들 사이에서도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그리스에서 사는 건 만족스럽다. 인구밀도가 한국보다 낮아 복작복작하지 않고 여유로운 게 가장 큰 이유다. 수도 아테네도 뉴욕이나 서울 같은 대도시 느낌이 아니라 한국의 지방도시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거의 없는 것도 마음에 든다. ‘외국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알바니아·불가리아·러시아 등 인접 국가에서 그리스로 이주해 사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하지만 외국인이 그리스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받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2~5년에 한 번씩 체류 허가를 연장해야 한다.

 사계절 내내 따뜻하고 맑은 날씨도 이곳 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 요소다. 6~8월은 낮 기온이 보통 30~35도, 한여름에는 40도를 웃돈다. 밤에도 25도를 넘어가는 날이 많다. 한국에서는 30도만 넘어가면 참을 수 없게 덥지만 이곳의 여름은 견딜 만하다. 지중해성 기후라 습도가 낮아서 그늘에만 있으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스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낮잠이다. 보통 오후 2시30분~5시 사이에 낮잠을 즐기는 문화가 있다. 이 시간에는 문을 닫는 상점도 많고, 다른 사람 집에 방문하거나 전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2010년 이후 그리스 노동부가 기업들이 근무시간을 조절할 수 있게 조치하면서 많이 사라지고 있다.

 이곳 물가는 전자제품 같은 수입품을 제외하면 한국보다 저렴한 편이다. 특히 육류나 어류가 싸다. 한국에서 1kg에 2만~3만원 하는 돼지고기를 이곳에서는 6.4유로(한화 약 8000원)면 살 수 있다. 대중교통 시스템도 잘돼 있다. 35유로(한화 약 4만4000원)짜리 한 달 정액권을 사면 버스·지하철 등 모든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하는 게 가능하다. 1.2유로(한화 약 1500원)짜리는 1시간30분 동안 사용할 수 있다.

 집값은 건물의 노후 정도나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전세는 없고 월세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같은 99㎡(약 30평) 집이어도 30년 된 건물은 월세가 350~500유로(한화 약 44만~63만원), 새 건물은 600~700유로(한화 약 75만~88만원)로 다르다. 매매가격은 30~35년 된 건물에 있는 99㎡(약 30평) 집 기준으로 15만 유로(한화 약 1억9000만원) 정도다.

 최근 채무불이행(디폴트) 사태로 경제상황이 나빠졌지만 아직 사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지난달 27일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채권단의 협상안을 거부하고 국민투표를 선언한 이후 사람들이 은행에 예금해 놓은 돈을 인출하고 슈퍼에서 마카로니·쌀·설탕·소금 등을 사재기하는 일이 있었다. 경제·정치적으로 불안한 건 사실이지만 이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윤인숙(46, 그리스 통역·가이드)
정리=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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