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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극복 …‘결혼 크레바스’를 넘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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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울 강남에서 중견기업 사내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최모(33)씨는 당분간 결혼 생각을 접기로 했다. 최씨는 “고시 공부로 사회 진출이 늦었는데 결혼해서 아이라도 생기면 사회 생활은 끝”이라며 “기반을 잡고 37세 이후에나 결혼을 고려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미혼 여성의 학력은 갈수록 높아지고 사회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는 반면 미혼 남성의 취업은 오히려 늦어지면서 최씨처럼 결혼을 늦게 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만혼·비혼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만혼·비혼 같은 ‘결혼 크레바스’ 현상의 확산은 출산 생태계를 뿌리째 흔든다. 여성의 초혼 연령은 1990년 24.78세에서 2014년 29.81세로 5.03세 높아졌다. 이로 인해 아이를 가장 많이 낳는 연령집단도 90년 25~29세에서 2013년 30~34세로 5세가량 올라갔다. 김혜영 숙명여대 정책산업대학원 교수는 “여성은 일반적으로 45세가 되면 사실상 가임기가 끝나서 결혼이 늦을수록 출산율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만혼은 둘째 출산율도 떨어뜨린다. 외국계 금융회사에 다니는 강소영(43)씨는 마흔에 결혼해 3년 만인 최근 아들을 낳았다. 그는 “육아휴직 6개월이 끝나면 다시 직장으로 복귀해야 하는데 나이도 있어 둘째는 엄두도 낼 수 없다”고 했다. ‘저출산 트랩(덫)’에 빠진 한국 사회의 단면이다.

 그러나 그동안 정부의 저출산 대책은 보육에만 초점을 맞춰 왔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가 쓴 저출산 대책 예산 가운데 70%가 보육 관련 사업에 배정됐다. 윤희숙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결혼을 미루고 기피하는데 보육에 돈을 쏟아부어 봐야 출산율이 올라갈 리 없다”며 “결혼의 병목 현상부터 해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 정책이 보육에만 집중된 건 저출산·고령화 대책의 실무를 보건복지부가 맡고 있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지난 2006년부터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구성해 5년 단위 기본계획을 마련해 왔다. 그러나 이름만 대통령 직속 위원회였을 뿐 활동은 지지부진했다.

대책 실무도 보건복지부가 맡았다. 이러니 복지부가 관할하는 보육에만 예산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출산·고령화란 산을 넘자면 정부와 민간의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복지부가 아니라 청와대나 예산권을 쥔 기획재정부가 총괄 기능을 맡아야 한다는 얘기다. 보육에만 초점을 맞춘 대책도 결혼 크레바스를 넘는 단계부터 육아를 거쳐 여성의 경력 단절을 막는 단계까지 세대별로 맞춤형으로 만들어야 한다.

 11일 세계인구의 날을 맞아 유엔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전체 인구의 13.1%인 한국의 고령화 순위는 세계 51위다. 그러나 2050년에는 고령인구 비중이 34.9%로 높아져 세계 3위 수준이 된다. 김동원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저출산·고령화는 노동력 부족과 소비 감소의 악순환을 불러온다”며 “지금부터라도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한국은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혼 크레바스(crevasse)=빙하의 거대한 크레바스(균열)처럼 미혼에서 결혼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생긴 균열을 말한다. 신혼주택을 비롯한 결혼 비용 마련과 청년 취업의 어려움,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에 따른 출산·육아비용 부담이 어우러진 복합적 결과다. 이는 결국 저출산·고령화·저성장을 연쇄적으로 가속화시키고 있다.

◆특별취재팀=김동호 선임기자, 박현영·정선언·김민상·김기환·정원엽 기자 d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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