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마종기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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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아주아주 오래전 나도 당신도 없고, 그러니 어떤 단어도 추억할 수 없는 골목에서 모두 잠들어 아무도 깨우지 않게 생활이 돌아눕는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에서 여태 어린 부부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을 것이다 고요가 잎보다 꽃을 먼저 흔든다

- 유희경(1980~)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

고요가 꽃을 흔드는 풍경
나를 일깨우는 젊은 상상력

시인들에게는 상식이긴 하지만 나 역시 내 마음을 흔드는 시 한 줄은 시의 주제나 내용보다 그 표현에서 온다. 나에게 좋은 시는 운율 좋고 교훈적인 경구나 인생관의 표출이기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은유의 전개나 표현이 먼저다. 그래서 나는 시가 철학이 되고 설교가 되고 관념의 도구가 되는 것에 반대하고 시란 것이 좋은 소설이나 훌륭한 산문의 최종 목표와 전혀 다른 방향이라는 것에 만족한다.

 내가 문청 시절에 배우고 외웠던 선배 시인의 시들은 내게는 어차피 피와 살이 되어버렸기에 이제는 젊고 싱싱한 시인들의 새로운 표현 방법을 즐기고 그 신선함에 자주 흔들려 깨어나는 축복을 누린다.

 1980년생 작가의 시 전문이다. 시작 부분에 쉼표가 하나 있을 뿐 끝까지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 없다. 골목길이 좀 길구나, 하는 느낌. 가다가 보면 시제까지 뒤바뀌고 있다. 색다른 전개에 잠시 당황한다. 그렇게 현재나 과거가 함께 뒤섞여 사는 골목. 거기 느릅나무가 하나 있고 어린 부부가 끌어안고 있고 고요가 꽃을 건드리는 조용한 풍경을 본다. 외로움 같은, 슬픔 같은 것이 시의 끝에서 우리를 감싸 안는다.  

마종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