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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플레인’ 잘난 척하는 남자 들 … 여성의 침묵·복종 바라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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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남자들은 …』의 저자 솔닛은 페미니즘 운동이란 “여성을 ‘침묵과 무기력의 자리’에 놓아두려는 이들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사진 창비]

‘페미니스트(feminist)’라는 단어에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가. 성(性) 차별에 당당히 항의하는 여성 혹은 남성? 사사건건 말꼬리를 잡고 ‘평등’ 운운하는 피곤한 언니 혹은 오빠?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봤다면 생각이 좀 달라질지 모른다. 이 사전에 실린 ‘페미니스트’의 뜻에는 ‘1.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 외에 이런 뜻도 있으니까. ‘2.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가 페미니스트’라는 표준국어대사전의 오랜 정의가 2015년 새삼 논란의 중심이 됐다. 올 상반기 한국 사회를 휩쓴 페미니즘 논쟁의 한가운데서다. 지난 1월 이슬람 무장단체 IS로 향한 한 소년이 “페미니스트가 싫다”는 메시지를 남기면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포털 사이트 검색어에 올랐고, 여성단체들은 국립국어원에 이 단어의 정의를 재검토해 달라는 의견서를 냈다. 이어 음악칼럼니스트 김태훈씨가 ‘무뇌아적 페미니스트가 IS보다 위험하다’는 내용의 글을 쓴다. 그 여파로 SNS에서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운동이 이어졌다. 개그맨 장동민 등의 여성 혐오 발언, 진보 논객으로 불리는 한윤형·박가분씨의 데이트 폭력 사건 등은 한국 사회 여성 인권의 현실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한 권의 책이 주목을 받았다. 5월 한국에서 출간된 미국 문화평론가 리베카 솔닛(54)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Men explain things to me)』(창비)다. 이 책은 솔닛이 한 파티에서 솔닛 본인이 쓴 책에 대해 저자보다 더 잘 안다는 듯 가르치려 들었던 한 남자를 만난 일화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작은 폭력이나 억압이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 등과 큰 맥락에서 이어져 있음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남자들이 여자에게 잘난 척하며 설명하려 드는 행태’ 정도로 해석되는 ‘맨스플레인(Mansplain)’이란 단어가 이 책으로 인해 알려졌고, 미국과 유럽은 물론 한국에서도 거센 논란을 불러왔다. 국내에서도 페니미즘 관련 책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현재까지 7000부 이상 팔려나갔다. 저자 리베카 솔닛을 e메일로 만났다.

 -당신의 책은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 다. 독자들에게 어떤 피드백을 받았는지.

 “아, 우리가 이만큼 많이 해방되었고 평등해졌다는 좋은 소식을 말씀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정말 좋은 소식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장소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물론 인도·터키·아르헨티나 기타 등등의 나라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대화가 오가고 있다고 들었다. 질병을 치료하는 첫 단계는 진단이다. 지금 그 단계라고 생각한다.”

 -지금 세계적으로 페미니즘이 주목받는 이유는.

 “확실한 답은 모른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주기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1970년대 초와 80년대 초, 90년대 초 애니타 힐 증언(클래런스 토머스 판사의 미국 대법관 임명 과정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여성 판사 애니타 힐이 의회 청문회장에서 성희롱 피해 사실을 폭로한 것)과 더불어 페미니즘의 에너지가 분출했고, 지금이 그렇다.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페미니스트들이 수십 년 동안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기 위한 강력한 기반을 꾸준히 쌓아왔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동의를 구하는 성관계, 쩍벌남(manspreading), 성희롱 등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오래전 심어진 씨앗들이 개화한 것이다. 또 페미니즘을 받아들인 개인들이 차츰 유력한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 하나의 이유라고 본다.”

 -‘맨스플레인’은 옥스퍼드 대사전에도 실렸다. 반면에 이 단어에 반감을 표시하는 남자도 많다.

 “많은 남자가 내게 맨스플레인이란 건 존재하지 않으며 남녀가 차별당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불행한 현상이 존재한다는 여자들의 말을 믿어준다. 정말 중요하지만 우리가 아직 하지 않은 대화는 현재의 체제와 강요된 남성성이 남자들을 어떻게 해치고, 어떻게 제약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바꿈으로써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남자들이 알아야 한다.”

 -한국의 경우 경제 상황이 나빠지고 취업이 힘들어진 최근 몇 년간 성별 간 갈등이 심해지고 여성 혐오의 목소리도 높아진 느낌이다.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남자들, 자신들이 역차별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자들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

 “남성 권리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여성이 침묵당하고 복종하는 세상으로 역행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을 정복하거나 처단해야 할 적으로 여기고,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믿으며, 그 전쟁에서 적(여성)을 물리치기를 원한다. 그러나 전쟁을 끝내고 서로가 적이 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비전도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보다 좀 더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더 큰 문제는 여성 혐오를 드러내는 태도가 만연해 다들 무감각해진 것이다. 혐오를 드러내는 게 그 자체로 개그가 돼 많은 사람이 즐기고 있다.

 “아, 나도 늘 당하는 일이다! 유머는 칼을 숨기고 있는 벨벳 칼집과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로 누군가를 찔러놓고는 찔린 사람이 불평하면 그들에게 유머 감각이 없다고 놀린다. 자신이 뱉었던 잔인하고 적대적이며 모욕적인 말이 웃긴 말이라고 고집한다. 하지만 인종, 육체와 장애, 섹슈얼리티, 기타 등등 많은 것에 대한 야비한 농담은 실제로는 유머의 문제가 아니다. 유머는 적대감을 정당화해 주는 가면이다.”

 - 그럼에도 당신의 책을 보면 페미니즘 운동이나 여성 해방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고 있는 것 같다.

 “50년 전 세상을 떠올려 보라. 당시 미국 연방대법원에는 여성 법관이 없었다. 영국·인도와 칠레에는 여성 총리가 없었다. 정치는 물론이고 다른 공적 영역에도 여성은 황당할 정도로 적었다. 기업과 대학의 유력한 지위에는 여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우리가 현재를 완벽한 상태와 비교한다면 현재의 불완전한 부분만 보게 된다. 하지만 현재를 과거와 비교한다면 다르다. 수십 년도, 수백 년도 아니고 수천 년 동안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의 처지가 얼마나 음울했는지와 비교한다면 우리가 지금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조언한다면.

 “한국의 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조언할 처지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각자의 희망과 욕구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고 더욱 장려되기를 바란다. 남자든 여자든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적으로 등장하는 상황은 모두의 삶을 더 음울하고 불쾌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가 페미니즘 논의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나.

 “글쎄, 트위터를 예로 들자면 누가 트위터를 운영하는지 봐야 할 것이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 무리의 백인 남성들이 운영한다. 알다시피 최근 그곳에서는 끔찍한 폭력과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다(트위터 간부 중 한 명이 전 부인을 강간해 고소당한 사건도 있었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어떤 이들이 그 기술을 운영하느냐다. 나는 소셜 미디어가 토론과 조직의 장으로 아주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소셜 미디어에서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잔인해지고 남에게 참견한다. 둘 이상의 사람이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런 현실적 접촉을 잃지 말아야 한다.”

 -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고 습관적으로 말하는 여성들도 있다.

 “용감해지세요. 연대하세요. 그리고 치열하게 고민하세요( Think hard).”

[S BOX] 반전반핵 운동, 월가 점령 시위 동참 … 걷기의 의미, 대형 재난 분석도

리베카 솔닛의 관심은 페미니즘에 국한되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캘리포니아대 저널리즘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솔닛은 1980년대부터 인권운동, 아메리카 원주민의 토지권 반환운동, 반전반핵운동 등에 참여했고 2011년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시위에도 적극 동참했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책들도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2003년 국내에서 출간된 『걷기의 역사』(민음사)는 인간의 삶에서 ‘걷기’가 갖는 의미를 성찰하는 책이다. 2006년 나온 『어둠 속의 희망』(창비)에서는 9·11사태 후 미국 진보세력이 겪은 참담한 패배를 돌아보며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좌파의 위기를 조목조목 살핀다. 2012년 출간된 『이 폐허를 응시하라』(펜타그램)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2005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이르기까지 99년 동안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한 대형 재난을 분석 하며 많은 이가 재난 속에서 강렬한 기쁨과 사랑, 연대의식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남자들은…』에서 언급했던 버지니아 울프와 수전 손태그 외에 작가로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이들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을 들었다. 페미니즘에 관한 에세이를 묶은 두 번째 책을 출간할 계획이라는 그는 “지금 당장은 뉴욕 지도를 만드는 중이다. 나는 샌프란시스코(내가 사는 곳)와 뉴올리언스의 지도를 작성했었는데 이번 작업은 그 시리즈의 세 번째”라고 말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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