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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친박의 사퇴 압박 … 누가 납득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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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촉발된 여권 갈등이 계파 간 대결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선 친박계 핵심 의원들에 맞서 비박계 초·재선 의원 21명은 어제 성명을 내 “여당 의원이 뽑은 원내대표를 청와대가 사퇴하라는 것은 과거 군사독재 정부 시절 때의 얘기 같다”며 사퇴 불가로 맞섰다.

 진정 조짐에도 불구하고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고, 그리스발(發) 디폴트 위기가 우리 경제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위기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청와대와 국회, 여와 야가 합심해 불 끄기에 나서도 모자랄 판에 집권세력이 원내대표의 사퇴 여부를 놓고 쌈박질을 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메르스 추경’ 편성이 시급하다면서도 정작 이를 맡아야 할 원내 사령탑의 교체를 요구하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이달 초 행정입법의 남용을 견제하는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위헌 논란이 촉발된 이후 국민들은 청와대와 새누리당 지도부가 대화를 통한 합리적 해결을 통해 정치적 파국을 막아야 한다고 주문해왔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끝내 거부권을 행사했다. 친박이라는 사람들은 눈만 뜨면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물러나라고 삿대질이다. 몇몇 친박계 의원들은 “원내대표가 책임져야 할 상황”(이정현 최고위원)이라거나 “유 원내대표가 끝까지 거부하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유 원내대표가 사퇴할 수 있도록 하겠다”(김태흠 의원)고 했다.

 이들이 ‘유승민 사퇴’의 명분으로 들고나온 가장 큰 이유는 대통령의 신임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원내대표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됐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자기모순이며 의회민주주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발상이다.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사적으로 임명한 부하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 입맛에 맞춰 그만둬라 마라 할 대상이 아니다.

 유 원내대표가 과거 야당 시절 박근혜 대표의 비서실장을 지낸 적은 있지만 지금은 엄연히 여당 의원 160명을 대표하는 원내 사령탑이요, 국회 운영을 주도하는 운영위원장이다. 의원총회에서 투표를 통해 선출된 원내 사령탑은 의총의 결의로만 교체될 수 있다. 그것이 삼권분립의 취지이고 의회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다. 대통령의 신뢰를 잃었다는 이유로 사퇴를 종용하는 건 자신들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뽑은 대표를 부정하는 일이다. 이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사퇴를 하든 안 하든 그건 전적으로 유 원내대표의 정치적 결단에 맡겨둬야 한다. 지금 집권세력이 해야 할 일은 코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살릴 수 있도록 국정을 정상화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