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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도 정치 실종 틈 타 '사법 정치' 활개친다

중앙일보

입력

워싱턴 정가가 ‘사법 정치’로 요동치고 있다.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건강보험개혁법(오바마케어) 합헌에 이어 동성 결혼 합법화라는 대형 판결을 잇따라 내놓은 뒤 공화당은 후폭풍에 휩싸였다. 반대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두 판결을 뒷받침한 여론을 선도했다는 호평을 만끽하고 있다.

그간 동성 결혼에 비판적이던 공화당 주자들은 대법원 판결 이후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전면 거부로부터 판결 수용에 이르기까지 우왕좌왕했다.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는 27일(현지시간) “전통적 결혼을 믿는다”면서도 “다른 이들도 존중해야 한다”는 애매한 발표를 했다. 목사 출신의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는 “사법 독재에 맞서야 한다”고 반발했지만 그간 동성결혼 합법화에 반대해온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판결에 동의하지 않지만 법은 준수해야 한다”며 물러섰다. 스콧 워커 위스컨신 주지사는 주 정부에서 결혼 성립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게 남은 방법”이라며 개헌을 꺼내 들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보수 인사를 대법관으로 지명하겠다”고 반응한 주자도 있다. 릭 페리 전 텍사스 주지사다.

보수 개신교의 표심에 의지했던 공화당이 겪은 충격에 대해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은 “대부분의 공화당원들은 지금 새로운 좌익 광풍을 보고 있다고 여긴다”며 “이건 초현실적”이라고 워싱턴포스트에 밝혔다.

그러나 동성 결혼에 찬성해온 클린턴 전 장관은 판결에 반색했다. 클린턴 전 장관은 “사랑이 이 나라의 최고 법원에서 승리했다”고 발표한 데 이어 트위터를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색으로 장식했다. 무지개색은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상징이다. 자신이 주도한 건강보험 개혁안에 이어 그간 공개 옹호해 왔던 동성 결혼에 대해 대법원이 승인 도장을 찍어줘 오바마 대통령이 최대 수혜자가 된 것은 물론이다.

사법 정치가 등장하는 데는 공화당도 일조했다. 공화당은 2013년 10월 오바마케어를 막기 위해 연방정부 부분 폐쇄(셧다운)까지 불사하며 보수 진영이 오바마케어를 법원으로 들고 가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오바마케어의 보조금 규정이 위헌이라며 시작된 소송은 ‘경쟁력 있는 기업 연구소’라는 보수 단체의 후원으로 원고 모집 작업이 이뤄졌다. 뉴욕타임스는 27일 “건강보험 싸움은 끝났다”는 사설에서 공화당이 오바마케어를 저지하기 위해 시도했던 소송과 법안 등을 거론한 뒤 “공화당은 건강보험법을 대체할 작동 가능한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사법 정치는 당장은 백악관에 승리를 안겼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미지수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민개혁 행정명령이 위헌이라고 반발해 공화당 주도로 이뤄진 소송에선 연방 항소법원이 공화당의 손을 들어줬다. 동시에 법적 판단은 정치적·사회적 타협이 아니기 때문에 반발의 여진이 더 크다는 한계도 있다. 미국 주류 여론은 동성 결혼 합법화에 호평을 보냈지만 대법원 내에서조차 이번 판결을 “사법 쿠데타”라고 비난하는 대법관이 등장했다.

사법 정치는 의회가 아닌 법정이 정치를 좌지우지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본류를 벗어났다는 우려를 낳을 수 있다. 오바마케어 소송의 경우 철학과 이익의 충돌을 조정할 의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정치를 법정으로 들고 가는 ‘정치가 빠진 법치’가 됐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정치 싸움을 법원으로 가져가려는 우리 국회나, 백악관과 공화당의 대립이 첨예화돼 소송 불사가 등장하는 미국 의회나 비슷한 양상”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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