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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말 안 통하는 사람은 아버지 … 남처럼 서먹서먹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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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호 14면

일러스트 강일구

요즘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만큼 힘들고 애달픈 존재가 또 있을까. 직장에서의 고된 하루는 그나마 가족을 위해 참고 견딘다지만 더 울적해지는 건 집에 돌아와서다. 가족에게서 위로와 힘을 얻기는커녕 왠지 겉도는 소외감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시민 모임 ‘함께하는 경청’이 조사한 한국인 소통 실태

지난 17일 ‘함께하는 경청’이란 시민모임이 출범하면서 실시한 여론조사(한국리서치, 전국 1006명 대상) 결과를 보면 그 실상이 짐작보다 훨씬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정·직장·사회에서의 대화·소통 실태를 조사한 결과 아버지와의 의사소통 수준은 친구나 어머니 등 다른 사적인 관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낮았다. 인간관계의 밀도가 낮은 직장 등 공적 관계에서의 의사소통 수준과 비슷하거나 더 낮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20~30대의 자녀와 50~60대의 아버지 간에 가장 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아버지와 자녀, 정치견해 다르면 최악
대화나 의사소통을 얼마나 잘하는지 묻는 문항에서 상대가 아버지인 경우 ‘잘한다’는 응답은 12%밖에 안 된다. ‘못한다’는 응답은 50%나 됐다. 이는 직장 상사나 집 근처 아는 사람과의 의사소통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반면 어머니와는 비교적 대화가 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화나 의사소통에서 아버지와 거의 비슷한 수준을 보인 존재는 ‘처음 만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의사소통의 빈도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아버지가 있는 응답자만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지난 한 주간 아버지와 전혀 대화나 의사소통이 없었다’는 응답이 40%나 됐다. 비슷한 빈도를 보인 것은 ‘처음 만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요컨대 의사소통 면에서 아버지는 ‘처음 만나는 모르는 사람’처럼 서먹서먹한 사이라는 얘기다. 이 땅의 많은 아버지가 느끼는 소외감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이번 조사에서 아버지보다 더 대화가 안 되는 상대는 딱 두 그룹,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사람’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자녀 간에 이해관계나 정치적 입장마저 엇갈린다면 최악의 조합이 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한 가정이 적지 않고 종종 절연이나 패륜 등 심각한 사태로 치닫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잘 안 되고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는 것은 왜일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대화에 임하는 자세, 특히 듣기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 대화나 토론이 잘 안 되는 주된 이유 역시 자기 말만 하려고 할 뿐 상대방 얘기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녀와 대화·소통을 잘하고 싶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먼저 들어주는 것이다. 꾸짖거나 잔소리를 하기 전에 우선 자녀에게 다가가 얘기를 들어보는 것이다. 퇴근 길에 자녀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사 들고 가거나 주말 편한 시간에 가까운 데 나가서 “공부 때문에 힘들지?” 하며 얘기를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자녀의 얘기 중에 언짢은 대목이 있더라도 도중에 자르지 말고 일단 끝까지 다 듣고 나서 아버지의 생각을 이야기해야 한다. 둘째, 얘기를 듣고 나서 곧바로 “넌 그래서 문제야!” “그렇게 네 맘대로 할 거면 집에서 나가!” 하는 식으로 훈계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대신 자녀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마음으로 듣는 것이 좋다. 얘기 중에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있으면 자녀에게 물어보고 자신의 생각도 이야기하며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다. 진정한 대화는 그런 과정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어떤 결론이나 해결책이 필요한 경우 부모 입장에서 섣불리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반발만 사기 쉽다. 보다 효과적인 것은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하고 자녀 스스로 해결책을 생각하고 제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이 만들고 약속한 것이기에 실천도 더 잘하게 된다.

한 언론인은 중학생 아들이 게임을 너무 많이 해 고민이었다. 늦은 시각 퇴근해 집에 가면 게임에 빠져 있는 아들을 보며 화가 났다. 그때마다 야단치다 보니 부자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이번 학기 대학원 ‘협상’ 수업에서 배운 대화법을 주위 사람과 아들에게도 적용하면서 달라지게 됐다. 아빠에게 야단맞을까 두려워 새벽에 일어나 게임하는 아들을 본 그는 전처럼 언성 높아지는 것을 간신히 참고 “게임이 그렇게 하고 싶었나 보구나” 하며 다가갔다. 전과 달라진 아빠의 말투에 아들은 놀라고 어색해했다. 그래도 계속 아빠가 아들의 마음을 알아주며 열린 자세로 다가가자 아들도 마음을 열고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결국 아들은 스스로 게임을 자제하고 부자관계도 부쩍 좋아지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먼저 자녀 말에 귀기울여야
이렇게 아버지가 먼저 달라진 자세로 다가가면 좋겠지만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몸엔 오랜 습관이 배어 있고 머릿속은 골치 아픈 문제로 가득 차 그럴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도를 하다가 자칫 더 나빠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엔 자녀들이 먼저 나서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울 테니 어머니가 중간에서 가교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말 편한 시간에 거실에서 TV를 끄고 다과를 나누며 대화 시간을 가져도 좋고, 자녀들이 좀 큰 경우엔 동네 호프집 같은 데 가서 담소를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족회의가 아니라 가족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인데, 이때 아버지가 전과 달리 자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대화가 제대로 되도록 만드는 비결이 있다. 먼저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아빠, 우리를 위해 일하시느라 힘드시죠? 저희 때문에 걱정도 많으실 테고. 저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해주세요” 하고 얘기를 청해 듣는 것이다. 자신이 힘든 얘기도 충분히 하고 자녀들이 귀담아 듣는 모습도 보게 되면, 이제 아버지도 자녀의 얘기를 들을 마음 상태가 된다.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이야기할 때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예컨대 아버지의 강압적 태도 때문에 힘든 경우 처음부터 아버지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고쳐 달라고 하는 것은 역효과만 낳기 십상이다. 우선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애쓰는데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그 다음 아버지의 어떤 점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이야기하는 게 좋다. 그렇게 아버지와 자녀의 마음을 잇는 ‘연결화법’으로 이야기하면 아버지도 차분히 듣고 공감하게 된다.

사실 경청과 대화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구성원 각자의 자세와 노력이 중요하지만 대화·토론이 잘 안 되는 우리 사회의 문화나 풍토도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학교나 사회에서 대화·소통에 대한 교육훈련도 필요하다. ‘함께하는 경청’이란 시민들의 모임도 이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런 일이야말로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기초를 다지는 일일 것이다.



강영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로 10년간 일했다. 하버드대를 거쳐 조지메이슨대 갈등해결연구원(ICAR)에서 갈등해결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겸임교수. 저서는 갈등해결의 지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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