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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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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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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대통령이 되고 싶었을까. 결국 어떤 대통령으로 남게 될까.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박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이후 바닥(29%)을 찍었다. 리얼미터도 마찬가지로 취임 후 최저 수준(34.6%)이다. 8월이면 벌써 임기의 반환점이다. 박 대통령의 꿈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남은 기간에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박 대통령의 임기 전반을 돌이켜보면 ‘참 운도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취임하자마자 국정원의 불법 선거 개입 문제로 시달렸다. 청문회에서 줄줄이 낙마하며 조각(組閣)부터 인사로 골머리를 앓았다. 윤창중 스캔들은 마무리 홈런이었다. 지난해에는 ‘세월호’로 세월을 보냈다. 올해는 ‘메르스’로 죽을 쑤고 있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이 구호로 현직이던 아버지 부시를 눌렀다. 사실 무엇이 경제만큼 중요하겠는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란 속된 말이 서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절박한 생존의 문제다. ‘창조경제’가 뭐냐를 따질 겨를이 없다. 재래시장의 할머니, 골목의 음식점에 손님이 찾아오고, 일용직 노동자에게 일거리가 떨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데 대형 사고가 온 나라를 마비시켰다. 세월호의 슬픔이 경기를 잡아먹었다. 얼어붙은 시장이 조금 숨을 돌리려는 순간 다시 메르스가 덮쳤다.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는다. 42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다. 농작물이 말라가고 있다. 북상하는 장마에 목을 매야 하는 판이다. 내년에는 총선이다. 그 다음해는 대선. 선거에 신경 쓰지 않고, 치적을 쌓을 수 있는 이런 기회에 가파른 슬로프를 타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어린 시절 하숙집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 붙였다고 한다. 사실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대통령이 되어 무엇을 하겠다는 꿈이 있어야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민주화를 목표로 삼았다. 선거 구호인 ‘군정 종식’을 실행했다. 군정의 핵심인 하나회를 해체했고, 금융실명제로 부패의 싹을 잘라버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 소원은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라고 말했다. 그만큼 그는 취임 후 할 것을 많이 준비했다. 재임 중 그는 “나는 ‘통일 대통령’보다 ‘IT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도 했다. IT 고속도로를 깔았고, IT 거품 논란까지 남겼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군정 종식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권위 타파는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 과거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동전의 양면인 민주주의 회복, 투명한 사회, 참여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시대정신에 편승한 덕분이다. 지금은 어떤가. 아무래도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다.

 박근혜 대통령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지향한다. 김영삼·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잘못된 것을 부수는, 심판자의 모습이다. 사회가 정상화된다는 것은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다. 보이지 않지만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세월호나 메르스처럼 기본이 잘못된 대형 사고가 잇따라 터진 것은 참 아이러니다.

 박 대통령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는 배신에 대한 깊은 절망과 분노를 적어놨다. ‘아버지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조차 싸늘하게 변해가는 현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고 썼다. 이런 나쁜 인간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마음을 뼛속 깊이 새겨놨을 법하다. 어제도 ‘배신의 정치’를 비판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는 종교적 심판자가 아니다. 버릇을 가르치고, 착한 사람에게 자리를 나눠주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를 임명하느냐 보다 무엇을 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맡길 일을 가장 잘 수행할 사람이라면 무조건 데려다 써야 한다.

 일단 일을 맡기면 권한을 함께 줘야 한다. 화환을 보낼 것인지 말 것인지, 감염자가 나온 병원 명단을 공개할 것인지 말 것인지 일일이 대통령이 결정하면 장관들은 받아 적기밖에 할 일이 없다. 장관이 장관이 되느냐 주사가 되느냐는 대통령에게 달렸다. 책임을 맡기고, 자신은 큰 꿈을 꾸어야 한다. 대통령은 임기 중 정말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대통령에게 선택의 기준은 국민의 이익이어야 한다. 국민을 위해서라면 굴욕을 감수하고, 악마와 손을 잡을 수도 있어야 한다. 구정물에 손을 넣어야 한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건 자신을 위한 결벽증에 불과하다. 세종시 건설 결정도 약속 때문이 아니라 국민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라야 한다.

 외교는 특히 그렇다. 냉혹한 현실이다. 악마도 천사도 없다. 철저히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가르치려 해선 안 된다. 나의 굴욕으로 국민의 행복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장마와 함께 갈라진 농토가 빨리 촉촉해지기를 기다린다.

김진국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