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인턴기자의 '현장에서'] 문재인과 팥빙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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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이 소문 다 났어.”

정치부 인턴 기자로서의 국회 출입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한 선배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1년을 취재했는데 문 대표와 팥빙수는커녕 팥 한 톨도 같이 못 먹어봤는데…”라며 이렇게 농담을 건넸다. 인턴 기자인 내가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팥빙수를 함께 먹었다는 소문이 퍼진데 대한 반응이었다.

정치부 기자들은 정치인을 가까이서 지켜본다. 내 임무는 문 대표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그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ㆍMERS), 국회법 개정안, 당 혁신 문제까지 민감하고 중요한 사안들로 고민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관심의 대상이자 그대로 ‘기사’였다. 그래선지 문 대표는 언제나 기자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문 대표를 몇 년간 취재해온 기자들에게도 그럴진데, 새파란 인턴 기자에게 문 대표는 더욱 먼 존재다. 질문은 커녕 공식 석상을 제외하고는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그가 "더운데 취재하느라 고생한다"며 "팥빙수라도 같이 먹자"고 했다.

지난 16일 문 대표가 메르스로 격리된 전북 순창의 한 마을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가뭄으로 메마른 밭에는 뜨거운 햇볕이 쨍쨍 내리비쳤다. 문 대표는 복분자 농사를 돕는다며 비닐하우스에 들어갔다. "이렇게 더운 날 비닐하우스라니…." 문 대표는 찜통 속에서 원망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복분자를 땄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땀이 쏟아졌다.

"이제 사진도 찍을만큼 찍었을텐데…."라는 원망이 나올 때쯤 문 대표가 ‘깜짝 선물’이라며 팥빙수를 같이 먹자고 했다. 다들 깜짝 놀랐다. "딱딱하다던 문 대표가 무슨 일이지?"라는 반응들이었다.

팥빙수란 무엇인가. 한 그릇을 두고 여럿이서 숟가락을 부딪혀가며 먹는 게 팥빙수다. 먹기만 하랴. 얼음을 부셔가며 일상, 고민 등을 얘기하다보면 팥도 적당히 섞이고 얼음도 녹아내려 먹기 딱 좋게 된다. 햇볕 뜨거운 날 친한 친구와 가족을 이어주고 서로를 공유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팥빙수다.

'국회에서의 문재인'과 ‘팥빙수를 함께 먹은 문재인’은 달랐다. 국회에서 본 문 대표의 얼굴엔 언제나 긴장과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이끌고 있는 새정치연합은 당내 갈등, 계파 문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대표직을 맡은 뒤 처음으로 치른 4ㆍ29 재ㆍ보궐 선거에선 유권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반면 팥빙수 그릇을 앞에 둔 문 대표는 달랐다. 고된 하루 뒤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하는 아버지의 편안한 모습이었다. 일상을 얘기할 때는 동네 아저씨의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의 편안하고 이완된 얼굴 속에서 지난 대선에서 ‘사람이 먼저다’고 외치던 문재인이 생각났다. 팥빙수를 나눠먹는 그의 모습은 기자로서 낯설었지만 사람으로선 반가웠다.

문 대표는 혁신을 준비한다. 그의 혁신은 딱딱한 ‘정치언어’로 포장된 소통이더라도, 근본은 ‘사람’을 외치던 ‘동네 아저씨’의 친근한 소통이기를 바란다. 숟가락을 부딪혀가며 사사로운 이야기를 할 줄 아는 그 모습을 국회와 민생 속에서도 보고 싶다. 소통이든 혁신이든 어깨에 힘을 빼야 더 순조롭지 않을까.

이유경 대학생(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인턴기자 leeyk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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