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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방주가 만난 사람] “모든 국민이 자신의 사상의학 체질 아는 날 오기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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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호 06면

김종열 박사 1959년 서울 출생, 서울대 건축학과, KAIST 토목과 석사, 경희대 한의대(학사), 원광대 한의학 박사,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연구원, 재단법인 익산원광한의원장, 한국한의학연구원 선임연구본부장 역임. 현재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기반연구부 책임연구원

한국한의학연구원 김종열(56) 박사는 한의학의 과학화에 온 힘을 쏟는 한의학자다. 그는 한의학에 공학과 서양의학을 접목해 한의학이 현대의학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수많은 연구를 해오고 있다.

한국한의학연구원 김종열 박사

 혀의 색을 보고 건강을 진단하는 설진기, 체질 분석 툴, 맥진기(맥의 변화를 측정해 출력하는 장비) 등 그가 개발한 표준진단시스템에는 이런 노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상의학(四象醫學)의 네 가지 체질에 따라 당뇨 발병 위험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대학병원과 함께 입증했다.

 물론 김 박사 혼자의 힘으로 한의학 전체가 과학화·표준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작업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 열정이 사그라지기는커녕 더 뜨거워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건설기술연 근무하다 한의대 진학
그는 서울대 건축학과를 나와 KAIST에서 토목공학 석사과정을 마친 공학도 출신이다. 사회 첫발도 정부 출연연구소인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서 건물 구조 해석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로 내디뎠다. 그러다 31세가 되던 1990년, 돌연 한의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희대 한의대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 한의사들의 경기가 아주 좋았던 때라는 생각이 들어 “돈 많이 벌기 위해서 그랬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연구소에서 축구를 하다 다리를 다쳤는데 마침 사상의학을 하던 한의사를 만났다. 그때 다리뿐 아니라 평생 고질병이었던 설사병까지 완치됐다. 어린 시절부터 병원을 들락거리고, 약을 달고 살아도 안 낫던 설사병을 고친 뒤 한의학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가 한의학의 과학화·표준화에 발 벗고 나선 것은 우연히 접한 TV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어느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람이 “여러 한의원을 들려봤는데 한의사마다 내 체질을 다 다르게 말하더라”는 장면이었다. 김 박사는 한의사의 한 명으로서 얼굴이 화끈거려 견디기 어려웠다고 술회했다. 그 환자의 경험담이야말로 당시 한의학계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던 가장 큰 걸림돌이자 한의원을 보는 일반인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특정 질환에는 한의학의 치료 효과와 예방의학 효과가 뛰어남에도 과학화가 부족해 불신을 자초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은 또 있다. 그의 노모가 암 치료 후 퇴원하는데 의사가 “한약은 절대 먹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단다. 김 박사로선 기가 막혔지만 그 의사와 대거리할 수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꼴을 당하면서 그의 가슴속에는 한의학의 과학화를 최대한 앞당겨야겠다는 각오가 새로워졌다.

투병 노모에게 한·양약 함께 치료
사실 중국에서는 한의학에 속하는 중의학과 서양의학의 협업을 통해 암환자들의 수명을 크게 늘리고 있다고 한다. 김 박사는 “서양의학과의 공식적인 협업 대신 집에서 노모가 한약을 함께 드시게 하는 한·양약 병용 치료를 한 결과 항암 치료 결과가 평균보다 월등히 좋아지게 됐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한의학의 한 부류인 사상의학을 현대과학으로 풀고 다듬는 데 노력하고 있다. 사상의학은 19세기 말 이제마 선생이 창안한 의학으로, 체질에 따라 개인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등 네 가지로 분류한다. 체질에 따라 취약한 질병이 다르고, 치료나 예방의학적 접근도 다르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인삼을 예로 들어 보자. 사상의학은 체질에 따라 인삼이 독이 되기도, 약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소양인인 필자의 경우 인삼을 먹으면 얼굴이나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기는 부작용이 나타난다. 그래서 사상의학은 소양인의 경우 인삼을 피하라고 했다. 이런 사실은 서양의학을 통해 알기 힘든 게 아닐까.

 체질 판별의 경우 꽤 신뢰도가 높은 시스템도 개발됐다. 이 시스템을 사용하면 한의사마다 체질을 달리 판단하는 일은 사라질 것으로 기대된다. 김 박사가 개발한 체질 분석 툴(SCAT·Sasang Constitution Analysis Tool)이 그것이다. 한의원에서 환자의 안면 사진, 음성, 체형, 성격 등의 정보를 인터넷으로 입력하면 체질을 분석해준다. 피험자 1만5000여 명의 한의학, 서양의학, 현대생물학적 정보를 수집해 구축한 체질정보은행도 김 박사 주도로 완성된 상태다. 이런 연구 방식은 중국에서도 모방하고 있을 만큼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태음인이 당뇨에 취약한 사실 밝혀내
지난해에는 아주대병원과 공동으로 태음인의 당뇨 발병률이 비만도에 상관없이 소음인에 비해 약 79%, 소양인에 비해 56% 높다는 사실을 정량적으로 밝혀냈다. 태음인이 당뇨병에 취약하다고 본 이제마의 병론을 현대적 데이터로 입증한 것이다. 또 소음인의 과민성 대장 증상이 태음인, 소양인보다 각각 2.9배, 2.5배 높다는 논문 등을 통해 소음인에게 위장병·설사가 많다는 사실도 과학적으로 입증해 냈다. 그가 등록한 국제 논문은 50여 편, 특허는 80여 개에 이른다.

 그는 한의학이 예방의학 측면에서 서양의학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현대의학이 지향하는 3P(Preventive:예방, Predictive: 예측, Personalized Medicine: 맞춤의학)를 실현하는 데 한의학이 많은 강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의학이 요즘 침체기를 맞고 있는 원인을 들여다봤을 때 그의 말에 쉽게 수긍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사상의학적 체질 분류에 따라 어떤 사람은 무슨 질병에 취약한지 파악해 예방·치료 방법을 선택한다면 그 효과는 높아질 수 있다. 물론 가야 할 길은 멀다. 현대적인 방법으로 사상의학을 과학화하지 않는다면 그의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혈액형처럼 체질을 인식하고, 또 그 특징은 어떤 것인지 알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 그때야말로 한의학의 부흥기가 될 것이다.



박방주 교수=중앙일보에서 20여 년간 과학전문기자로 활동했으며, 2009~2012년 한국과학기자협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가천대 전자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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