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벼랑 끝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일시적 디폴트 선언 뒤 협상 통해 유로존 잔류 유력

중앙일보

입력

그리스와 채권단의 구제금융 협상이 결렬된 직후인 19일(현지시간)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갔다. 러시아가 추진하는 가스관 건설 참여를 논의하기 위해서라는 게 겉으로 드러난 이유지만 시장에선 돈을 빌리기 위해서란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러시아 타스 통신은 부총리의 발언을 인용해 '그리스에 금융지원을 검토할 준비가 돼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 정부 대변인은 양측 회담에서 금융지원 논의가 있었느냐는 물음에 “없었다”고 했지만 일각에선 30억 유로(약 3조7600억원)를 지원할 거란 얘기가 흘러 나왔다.

그리스는 당장 이달 말까지 국제통화기금(IMF)에 15억 유로를 갚아야 한다. 러시아가 30억 유로를 빌려 줄 경우 급한 불을 끌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 된다. 다음달의 70억 유로를 비롯, 갚아야 할 돈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빚은 3000억 유로가 넘는다. 트로이카(IMFㆍECB(유럽중앙은행)ㆍEU(유럽연합))로 불리는 채권단과의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그리스의 디폴트(채무불이행)는 피할 수 없다. CNN은 투자은행 바클레이즈의 전문가를 인용 “시장에서 디폴트 확률을 75% 이상으로 본다”라고 전했다.

그리스는 2010년(1차), 2012년(2차) 두 차례에 걸쳐 2450억 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 그 프로그램이 이달 말 끝난다. 채권단은 구제금융을 분할해 지원해 왔는데 현재 남은 지원금은 72억 유로다. 이 지원금을 받아야 이달 말 IMF 부채를 갚는다. 이후 추가협상을 통해 새로운 구제금융을 받아야 남은 채무를 상환해 나갈 수 있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처럼 채권단의 그리스 지원에는 조건이 붙는다. 세금인상을 통한 세수증대, 공공부문 임금 및 연금 삭감을 통한 재정 건전성 강화, 노동시장 유연화, 공기업 민영화 등이다. 한 마디로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것이다.

시리자 집권 후 첨예 대립

그리스는 구제금융 이후 나름 긴축과 구조조정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경기침체와 높은 실업률 속에서 결국 올해 긴축에 반대하는 급진좌파연합(SYRIZAㆍ시리자)이 집권하면서 채권단과의 갈등이 심화돼 왔다. 양측은 올 들어 수차례 구제금융 지원을 위한 방안을 논의해 왔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은 마지막 시도로 22일 그리스 사태 해결을 위한 긴급 정상회의를 소집한다. 이날 회의에서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면 25~26일 브뤼셀에서 열리는 EU정상회의가 남아 있지만 정상회의의 주요 의제는 영국이 제안한 EU 협약 개정안이기 때문에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은 사실상 22일이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와 채권단의 입장 차는 여전히 크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채권단을 ‘약탈자’라고 강력 비난했다. 채권단의 요구는 그리스를 더 피폐하게 할 뿐이란 것이다. 그리스 경제규모는 2008년 3559억 달러에서 지난해 2375억 달러로 30% 이상 쪼그라 들었다. 경제 성장률은 2010~2013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2013년 기준 그리스의 실업률은 27%로 유럽연합(11%)의 배 이상이다. 청년 실업률은 50%대다.

월 700유로(약 88만원)의 연금으로 생활하는 파나기오티스 코팔리디스(68)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세 자식은 모두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다. 이미 연금이 많이 깎였는데 여기서 더 깎이면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며“ 채권단은 연금 생활자들이 빨리 무덤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듯하다”고 긴축요구에 분통을 터뜨렸다. 현재 그리스에서 연금은 가족 전체를 책임지는 주요한 소득원이다. 그리스 정부가 연금개혁에 손을 대기 어려운 이유다.

향후 전개 그리스 사태의 전개 방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이달 30일 이전에 협상을 타결해 앞으로 돌아오는 빚을 갚고 이후 200억~500억 유로 규모의 3차 구제금융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둘째는 디폴트 선언ㆍ유로존 잔류다. 일단 협상이 결렬되고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되 추가 협상을 통해 결국 합의하고 그리스가 유로존에는 남는 것이다. 셋째는 그리스가 디폴트 후 유로존 탈퇴(그렉시트) 수순에 들어가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타결 불발→일시적 디폴트→재협상을 통한 재지원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예상한다. 디폴트가 실제로 일어나면 그리스는 수출입 중단, 생필품 부족, 물가폭등 등으로 심각한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그리스 안에서는 디폴트 전략을 쓰되 타협을 통해 해결책을 찾기를 원하는 목소리가 높다. 유로그룹 안에서도 시장 불안·신뢰성 타격으로 재협상이 필요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치킨게임 두 열차, 협상 여지는 남겨

유로존 탈퇴는 그리스나 유로존 모두 원하는 게 아니다. 양측 모두에게 치명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나와 독자적인 화폐(드라크마)를 발행할 경우 경쟁력 강화를 위해 화폐가치를 떨어뜨리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는 제조업 수출의 비중이 낮은 나라라 효과는 미지수다. 오히려 물가 급등과 예금 인출, 빈부 격차 확대를 유발해 그리스 경제가 붕괴할 수 있다. 또 경기 회복을 위해 긴축을 완화하고 국채 발행을 통해 재정을 확대하려 하겠지만 국채 매입자가 거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금융센터 김위대 유럽팀장은 “그리스의 디폴트와 그렉시트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며 “일시적 디폴트로 갈 수는 있지만 그리스는 유로존 탈퇴로 얻을 이득이 거의 없어 유로존 탈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EU도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유럽과 글로벌 금융시장의 혼란이 불 보듯 하고 스페인ㆍ이탈리아 등 재정이 취약한 남유럽 국가에 미치는 악영향도 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국민도 대부분 유로존 잔류를 원한다. 여론조사기관 GPO가 15일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유로존 잔류를 원하는 그리스 국민은 70% 수준에 달한다. 능력없는 가난한 나라가 유로존을 떠났을 때 어떤 결과가 올 지 잘 알기 때문이다.

치킨 게임을 벌이는 두 열차가 지금 마주보고 달려 오고 있다. 과연 파국을 면할 것인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8일 협상 결렬 후 “사태 해결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했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추가적인 조정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며 협상 여지를 남겼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두 열차가 브레이크를 걸기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염태정 기자 yonni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