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극영씨(81·동요작곡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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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80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 유치원생같은 천진스런 웃음을 간직하고 있는 윤극영씨(81·동요작곡가). 그의 얼굴이 풍상에 찌들지않고 소박하며, 육신 또한 정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이를 향해, 어린이와 더불어 일생을 살아온 당연한 보답으로 여겨진다.
햇별이 따뜻한 1923년 3월초순, 일본동경근교 하숙집마루에서 볕을 즐기고 있던 20세의 윤선생에게 낯선 한 청년이 찾아왔다.
『윤극영이지. 나 방정환이야』그날 초면인 둘은 밤늦게까지 윤선생의 풍금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4살 손위인 소파는『말도 뺏기고 노래도 뺏겼다. 우리는 노래라도 찾아서 어린이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설득, 선생의 민족혼을 자극해 아침에는 어린이를 통한 민족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승낙을 받아냈다.
이렇게 해서 당시 일본동양음악학교 재학생으로 성악가의 꿈을 키우던 윤극영씨의 삶은 나라잃은 설움을 노래부르는 동요작곡가로 급전하게됐다.
같은해 5월1일 선생과 소파등이 중심이 돼 색동회가 탄생했다. 『씩씩하게 참되게 아름답게 서로서로 도와 갑시다』라는 주제아래 색동회는 5월1일을 「어린이 날」로 제정하는 한편 그동안 아동·아이·어린애·소년 등으로 불리던 명칭을 「어린이」로 통일, 사회적인 보급에 나섰다. 이때 제정된 「어린이 날」은 해방후 5월5일로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은 이듬해 색동회 이념 보급을 위해 귀국, 현재의 거처인 서울쌍문동 일성당에서 동네 어린이를 모아「다알리아회」를 조직했다. 이때 작곡된 것이 너무나 잘 알려진 『반달』 외에 『설날』 『고드름』 『따오기』등이다.
『어린이들과 함께 등사기로 인쇄해 각 학교에 보낸「반달」이 널리 불려진 때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였지. 일본인들 사이에서까지 불려질 때 나는 일본을 이겼다고 생각했어』
해방후에는 동요작곡을 계속하는 한편 어른들을 대상으로「동심문화」보급에 지금까지 노력하고있다.
『「동심문화」는 날로 각박해지는 어른들 마음속에 잠재해있는 동심을 일깨워 사회를 맑게 해보자는 취지지』
각종 잡지에 기고하는 글에서나 강연회에서나 잃어버린 동심을 되찾기를 강조했단다.
『젊은이들의 모임인 「우림회」가 매달 한번씩 우리집에서 세미나를 갖지. 나는 그들을 만나서 젊음을 마시고 그들은 여러가지 주제로 토론을 하지』 새벽3시에 일어나 간단한 맨손체조로 일과를 시작하는 선생은 발표와는 관계없이 지금도 1시간정도 동시를 짓고,「동심문화」에 대한 수필을 쓴다.
『어른은 때투성이라 늙은이 친구는 하나도 없어. 동네에 나가 뛰노는 귀여운 계집아이를지켜 보는 것이 요즘의 낙이지』라며 예의 천진한 웃음을 짓는다.<글 김상도기자, 사진 양원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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