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2)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15)-시대일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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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남선은 2년6개월의 징역살이를 하다가 7개월을 앞당겨 1921년 10월에 가출옥하게 되었다. 그는 신문관을 해산하고 동명사를 창립한 뒤에 1922년 9월 종합시사주간지인 『동명』을 발간하였다. 최남선이 감집으로 되고 진학문이 주간이 되었다. 창간호 2만부가 2, 3일동안에 다 팔렸고 제3호부터는 육당이 집필한 『조선역사통속강화』가 실리자 학생들간에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주간잡지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독자들에게 친밀감을 주지 못했고 또 잡지의 내용이 딱딱하고 난해해서 독자들이 잘 따라가기 힘들었다. 더구나 총독부 경무국은 계속적으로 판매금지를 시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으므로 더 계속할 수 없어 1923년 6월 23호를 끝으로 폐간하였다.
『동명』이 당시의 일간신문의 부수를 능가하는 2만부가 거뜬히 매진되는 것을 보자 주간지를 하지 말고 아주 일간신문을 하자는 의논이 일어났고 자진하여 자금을 대겠다는 사람이 많이 생겨났다.
육당은 이에 기운을 얻어 시대일보의 발행허가를 얻고 창간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막상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놓고보니 돈을 대겠다는 사람이 자꾸 자빠져 갔다. 그러나 차차 내겠거니 하고 민병덕이 내놓은 5천원을 가지고 우선 신문을 창간하였다. 명동 동순태빌딩에 사옥을 정하고 1924년3월31일에 시대일보를 발간하였다.
사장겸주간 최남선
편집국장 진학문
논설반 안재학·변영만
정치부장 안재학
사회부장 염상섭
기 자 현진건·나빈
시대일보가 나타나자 『동명』때와 같이 인기가 비등하여 당장에 2만부를 인쇄하고 동아일보를 여지없이 눌러 버렸다.
이렇게 주로 최남선 개인에 대한 인기로 인하여 화려한 출발을 하였으나 튼튼한 자본이 없이 모험적으로 시작하였고 뒤따라서 자금이 들어올 것을 기대했으나 악속과는 틀려 말만 했지 돈은 내지 않았다. 육당 자신은 신문관사업으로 재산을 탕진했으므로 내놓을 돈이 한푼도 없었다. 이리하여 창간한지 석달만에 제작비와 인건비를 당하지 못해 허덕거리게 되었다.
이때에 나타난 것이 보천교였다. 보천교는 기미독립운동 뒤 갑자기 교세가 팽창해져 수입이 좋아졌으므로 신문을 경영할 생각이 들었다. 교주 차경석은 사람을 시켜 경영난에 빠진 시대일보의 내막을 조사하고 공동경영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이때 육당은 20만원의 주식회사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 우선 급하므로 3만원을 받아썼다. 이것이 보천교한테 물려 보천교가 판권을 요구하게된 장본인이 된 것이다.
3만원의 미끼를 던진 차경석은 우선 부사장자리를 달라고 요구했고 경영권과 인사권을 요구해 오더니 필경 발행인 명의를 보천교측의 이성영으로 변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놀란 사원들은 「사우회」를 조직하여 이에 반대하고 나섰고, 일반사회측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아 시대일보사건 토의회를 열고 보천교가 경영권을 넘겨 줄것을 촉구하였다.
어쩔수 없이 보천교도 사회여론에 굴복해서 후퇴했으므로 신문은 9월1일부터 속간되었다.
그러나 편집국장 진학문이 퇴사하고 육당도 운영이 뜻과 같이 되지 않아 사장자리를 물러났다.
육당은 다시 양사동 일현각으로 돌아가 저술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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