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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보 염상섭
염상섭은 민태원·김형원·유광렬·정인익등 이른바 이상협휘하의 사천왕패들과 같은 시대에 이상협 아래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했었지만 이상협의 사람은 아니었다. 염상섭은 사천왕등 쌀에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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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7)「광문회」와 「동명사」
육당이 조선광문회를 창설한것은 1910년으로, 그의 나이 21세때. 광문회가 있던 자리는 지금의 을지노 입구에서 삼각동 고가도로 쪽으로 뚫린 삼각동이었다. 육당은 광문회를 창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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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2)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15)-시대일보
최남선은 2년6개월의 징역살이를 하다가 7개월을 앞당겨 1921년 10월에 가출옥하게 되었다. 그는 신문관을 해산하고 동명사를 창립한 뒤에 1922년 9월 종합시사주간지인 『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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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88)|염상섭
염상섭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자주 나왔는데, 여기서는 그의 이력을 중심으로 하여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볼까한다. 염상섭은 서울 필운동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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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3)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 (86)|총독부의 언론탄압|조용만
그 당시에 신문을 경영하기란 참으로 힘들었다. 독자들은 총독정치에 반대하여 사사건건 물고 뜯는 신문을 만들기를 원하였다.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도 집안 어른들이나 동네사람들이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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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151》|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84)-조용만
1925년 봄에는 각종 단체의 대회가 서울에서 집중적으로 개최되었다. 4월에는 각 신문사사회부기자로 구성된 철필구락부 주최로 전조선 기자대회가 열렸고 이어서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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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초창기의 동아
1920년4월에 창간된 후로부터 24년 조선일보가 혁신 재출발할때까지 동아일보는 우리나라 언론계를 힙쓸고 있었다. 이상협은 『조선에서 신문을 아는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자부심을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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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6)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79)|동아일보
4월1일 동아일보가 나타나자 서울 장안은 떠들썩했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사라진지 10년만에 신문 배달부의 요란한 방울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 나왔던 것이다. 동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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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1)-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 대기자 안재홍
당시의 잡지검열은 한달치 원고를 죄다 만들어서 그것을 묶어 가지고 도서과에 제출하는데, 그것을 검열하는 직원들이 늑장을 피고 제때에 검열을 끝내주지 않아서 잡지가 시일에 맞게 나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