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보 염상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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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염상섭은 민태원·김형원·유광렬·정인익등 이른바 이상협휘하의 사천왕패들과 같은 시대에 이상협 아래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했었지만 이상협의 사람은 아니었다.
염상섭은 사천왕등 쌀에 기분이 나빠서 매일신보 정치부장을 그만두고 당장 만선일보의 편집국장이 되어서 만주국 신경으로 떠나버렸다.
그때 진학문이 만주국의 참사관으로 만선일보를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혹은 두 사람이 미리 짜고 염상섭을 만선일보로 데리고 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진학문과 염상섭이 가까운 사이가 된 경위는 이렇다.
염상섭이 일본에 있을때 독립운동으로 감옥생활을 하고 나와 당시 자유주의적 신문인 대판조일신문에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논문을 투고하였다.
그때 대판조일신문의 주필이 유명한 도리이 소센(조거소천)이었다. 그는 이 투고논문 이야기를 당시의 대판조일신문 기자였던 진학문에게 하고, 대단히 잘 쓴 논문이지만 신문에 낼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뒤에 진학문이 염상섭을 만났고 때마침 서울에서 동아일보가 창간되어 이상협이 편집국장이 되고 진학문이 정치부장이 되었다.
진학문의 추천으로 염상섭을 일본에서 불러내 정치부기자로 임명하고 총독부에 출입하는 일을 맡겼다.
이 이야기는 염상섭 자신에게서 들었다. 그때 염상섭의 짐은 누하동의 조그마한 집이었는데 별안간 아침마다 대문앞에 신문사 인력거가 오고 새파랗게 젊은 염상섭이 그 인력거를 타고 거드럭거리고 나가는 것을 보고 동네사람이 모두 놀라 그 집에 큰 수가 났다고 수군댔다고 한다.
당시 총독부 출입기자는 신문사의 체면상 인력거에 태워 왕래시키고 양복도 좋은 것을 입혔다고 한다.
염상섭은 일약 일등신사가 된 것이다.
그 뒤로 진학문은 동아일보를 나와서 시대일보의 편집국장이 되었고 염상섭도 따라나와 정치부기자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염상섭은 진학문의 사람이 되었고 만선일보 편집국장이 된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본직은 신문기자지만 부업은 소설가였다.
동아일보에 다닐때 잡지 『개벽』에 『표본실의 청개구리』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발표해 호평을 얻었고 이어 방인근이 경영하는 문예잡지 『조선문단』에 단편을 많이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시대일보를 나온뒤 여러 신문사로 전전하면서 연재소실을 끊임없이 발표하였다.
『삼대』라는 장편소설은 그의 대표작으로 문학사에 남을 작품이라고 한다.
중국문학자인 양백화는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여서 이 사람만은 통내외하고 다녔다. 그때 서울사람의 풍습은 집에 손님을 들어 오게할 사랑방이 없으면 그냥 대문밖에서 이야기하다가 보내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주 절친한 사이인 때에는 손님을 부인과 인사시키고 안방으로 들어오게해서 술도 대접한다. 이것이 통내외다.
횡보는 툭하면 신문사를 그만두고 집에 죽치고 들어앉았을 때가 많았는데 이런 때에 백화가 오면 대환영이었다.
뿐만 아니라 백화는 횡보를 위해서 여러 군데로 수소문해서 적당한 일자리를 구해주는 것이었다.
그때는 신문사의 이동이 많아서 새로운 자본주가 들어와서 서너달 해보다가 신통치 않으면 그만두고 나가버리므로 신문사 간부들과 사원들이 자주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횡보는 가만히 앉아서 백화의 주선으로 신문사에 자주 취직했다. 횡보는 보통 때는 말없이 덤덤히 앉아있는 편이지만 일단 술이 들어가면 말이 많아져서 동경에 있을때 여류화가 나혜석과 연애하던 이야기, 또 변누구라는 여자가 자꾸 따라다녀서 혼났다는 이야기등 여자관계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였다.
횡보의 주량은 굉장했다. 월탄 박종화집에서 술을 마실 때면 제일 먼저 곤드레가 되는 사람이 양백화이고, 그 다음이 가남 이병기, 그리고 안서 김억의 순서였다. 횡보는 남들이 모두 취해서 정신을 못차릴때에 술맛이 난다며 술이 없으니 더 내오라고 사랑에서 안에 대고 고래고래 악을 쓰는 것이었다.<고려대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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