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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6)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79)|동아일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4월1일 동아일보가 나타나자 서울 장안은 떠들썩했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사라진지 10년만에 신문 배달부의 요란한 방울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 나왔던 것이다.
동아일보의 두 지주는 주간 장덕수와 편집국장 이상협 이었다. 두사람이 다 30살이 안된 패기에 넘치는 청년들이었는데, 장은 사설·논설을 쓰고, 이는 전지면의 총괄이외에 「횡세수세」 「휴지통」등 단편을 썼다.
『주지를 선명하노라』는 창간사를 써 호평을 받은 주간 장덕수는 황해도 재령출신으로 호는 설산이다. 가세가 빈한하여 통감부리사청의 사동노릇도 했는데, 동경에 건너가 고학으로 조도전대학을 졸업하였다. 상해로 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여운형·김규직과 함께 신한독립당을 조직하였다. 기미운동직후 일본에서는 조선인의 주장을 들어보자는 의견이 있어 관동청 장관인 고하렴조가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해 여운형을 국빈대우로 일본에 초청하였다. 이 일은 수상 원경이 조선총독부도 모르게 추진시킨 일인데, 그때 여원형의 통역으로 장덕수가 발탁되어 유명한 제국호텔에서 일장 연설이 있었다.
장덕수는 조도전대학시절 전 일본 학생웅변대회에서 1등을 수상한 웅변가였다. 통역으로 동경에 갈때 장덕수는 신한 청년당 사건으로 전남 하의도예 감금중 이었는데, 통역일 때문에 풀려나 서울로 올라와 동아일보의 창간을 맞아 그 주간으로 취임하게 된것이었다.
내가 보통학교에 다닐때 마침 장덕수집이 우리집 건너에 있어서 조석으로 동정을 알게 되었는데, 가족은 모친과 누이동생을 합한 3명뿐 이였고, 장덕수는 검정두루마기에 회색빛 캡을 쓰고 푸른빛 책보를 끼고 신문사에 왕래하였다. 하루는 얼굴이 퉁퉁붓고 상처가 나있어 어쩐일인가 했었는데, 그것이 소련에서온 운동자금 관계로 억울하게 당한 좌익측의 테러사건 때문이라는 것을 동네사람에게 들어 알았다. 그 직후 설산은 미국으로 갔다가 얼마 뒤 귀국해 해방 전에는 보전교수로 있었고, 해방 후에는 한민당의 외교부장으로 활동중 1947년 흉탄에 쓰러졌다.
동아일보 창간당시의 기자들은 모두 애국지사들 이어서 독립운동의 현역군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일반사회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간부급에 겸임이 많아 편찬국장 이상협은 사회부장 정리부장을 겸하였고, 진학문은 정치부장·학예부장을 겸하였고, 장덕수의 형 장덕준은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하였다.
그까닭은 동아일보가 창간되던 해는 기미만세사건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여서 아직 수많은 사람이 옥중에 있었고, 특히 그중에는 앞으로 언론계에서 크게 활약할 것이 기대되는 많은 인재가 있었다. 명실 그대로 우리민족의 대변기관임과 민족지성의 집결체임을 자임하고 나선 동아일보는 이들 옥중인사들을 맞아들인다는 예상아래 이들에게 배정할 부서를 잠시 다른 사람들이 겸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당시 동아일보의 정치부장이였던 진학문이 나한테 한 이야기인데, 그는 인사가 예견되는 인물로 최남선·송진우·현상윤등을 손꼽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대단해 기자가 취재차 시골에 내려가 여관에 들면 그 여관에서는 기자가 와 묵는것만도 영광이라고 해서 숙박료를 안받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우리동네에 살던 장덕수도 동네 사람들이 존경해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던 것을 나는 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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