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1)-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 대기자 안재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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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당시의 잡지검열은 한달치 원고를 죄다 만들어서 그것을 묶어 가지고 도서과에 제출하는데, 그것을 검열하는 직원들이 늑장을 피고 제때에 검열을 끝내주지 않아서 잡지가 시일에 맞게 나올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빨리 봐달라고 술을 먹이고, 돈을 쥐어주고 하지만 5월호 잡지가 5월 그믐께 나오고, 한달을 거르기도해서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순조로운 때이고, 조금만 이상하면 원고를 압수하고 내보내므로 다시 다른 원고를 보충해야하고 만일 압수 당한 원고가 전체 원고의 반이 될 때에는 그달치 원고를 전부 압수해 버려서 다른 문제없는 원고까지도 덩달아 뺏기고 마크도 나도 이런 경우를 당했는데 대학을 졸업하던 해니까, 1932년에『대중공논』이란 잡지에 보낸 원고가 이 꼴을 당해서, 내 소설과 이효석의 소설원고가 모두 까닭없이 몰수된 일이 있었다.
원고를 쓰는 사람은 대개 어떻게 쓰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피해서 요령있게 쓰지만, 어떤 때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 걸릴 때도 있어서 검열관이 기분에 따라서 막 하는구나 하는 불쾌한 생각을 갖게 될 때가 있다. 그때의「검열관 나리」란 우리동포였으니까 말이다.
논설기자로 압수를 자주 당하는 사람에 유명한 민세 안재홍이 있다. 그는 24년에 최남선이 사장이 되어 발간한「시대일보」의 논설반이었는데, 이분이 쓴 사설이 자주 압수당해서 신문의 손해가 퍽 컸었다. 손해가 컸을 뿐만 아니라 편집국장인 주학문이 그때마다 경무국에 불려가서 신문을 정간시키느니, 어쩌느니 하고 갖은 욕을 다 당했다.
진학문이 돌아와서 신문을 살리기 위해 제발 주의해 써달라고 애걸하다시피 하면 안재홍은 그렇게 하마고해서 며칠동안은 무사하게 지내지만 얼마 안 가서 또 압수당할 사설을 쓰는 것이었다.
안재홍은 우리나라 언론계에 있어서 논설 잘 쓰기로 유명한 대기자이지만, 이 양반은 너무나 솔직해서 할말을 다하고도 경무국 검열관이 트집 잡을 수 없는「요령좋은」글을 쓸 줄 몰랐다. 이 때문에 그는 조선일보 주필시대인 28년5월에「제남 사건의 벽상관」이란 제목으로 일본군의 중국 산동출병의 음모를 갈파한 사실을 써서 조선일보는 무기 정간을 당했고, 필자인 안재홍이 금고 8개월의 사법처분을 당하였다.
춘원은 편집국장으로서 압수를 당하지 않도록 무척 조심해서 신문을 만들어 갔지만, 필경 『네이선』지 사건으로 이듬해인 30년 4월에 동아일보도 무기정간을 당하였다.
30년은 동지의 창간 10주년이므로 국내·국외인사들의 10주년 기념축사를 받아 신문에 게재 했는데, 미국의 유명한 시사잡지『네이선』의 주필이 보내온 축사가 불온하다고 해서 삭제를 당하고 신문은 무기 정간을 당하였다. 축사의 내용은 동아일보가 그동안 민족의 자유와 군국주의를 반대해 왔다는 것을 찬양한 것으로 별 것이 아니었고, 외국손님의 축사이므로 손을 댈 수 없어서 그냥 실은 모양인데, 이것이 걸린 것이다. 그 축사를 실은 책임자가 편집국장이므로 춘원의 책임을 물어서 무슨 조치가 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춘원은 무사하였다. 안재홍 같은 직접 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 몰랐다. 그때는 날마다 신문을 내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다.
춘원은 이 무렵에 신문사설·연재소설, 그리고 횡설수설까지 서너가지를 날마다 집필하느라 몹시 격무에 시달렸다. 석간신문이 아무 탈 없이 배달되고 하오5시만 닥치면 그는 푸른 책보를 끼고 신문사를 나서 서울 숭인동 집으로 직행하였다. 집에 가서 손발을 씻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는데 『삼천리』니, 『별간신』이니, 『잡생』이니 하는 잡지에 끊임없이 글을 써갔다. 그는 잡지사에서 원고를 평하면 거절을 못하는 성질이어서 건강이 좋지 못하면서도 놀라운 정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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