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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가뭄과 역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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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강줄기가 말랐다. 지독한 가뭄에 논밭이 탄다. 역병도 돈다. 어디선가 옮겨 붙을지 모를 역귀(疫鬼)가 무섭다. 가뭄과 역병, 조선 백성을 괴롭혔던 공포가 2015년 초여름 대한민국을 덮쳤다. 유교국가 조선은 두 유형의 재앙을 군주의 책임이라 여겼다. 혹독한 가뭄이 급습했던 1882년 고종은 경천휼민(敬天恤民)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그해 4월 19일 삼각산·목멱산에서 기우제를 거행했다. 한강·남단·종묘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렸고, 5월 18일 사직단에 대신들을 모아놓고 기우제를 지냈다. 6월 10일 난병들이 대궐에 난입한 다음 날(임오군란) 드디어 비가 내렸다. 흙비(土雨)였다. 고종은 변란 때문에 술도 한잔 못했을 것이다.

 1895년 한양에 호열자가 돌았다. 서대문 고갯길에 시체가 즐비했다. 서양의사 알렌과 스크랜턴이 야전병원을 열고 역병과 맞섰지만 전국에서 십수만 명이 죽었다. 고종은 1474년 제정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여제(<53B2>祭)를 지냈다. 여제는 역귀를 달래 멀리 보내는 제사로, 왕이나 지방관이 주관하고 1년에 보통 세 번, 역병이 돌 때에는 시를 따지지 않는다. 콜레라가 다시 창궐하던 1902년까지 여제는 오백 년이나 계속됐다 (신동원, 『호환, 마마, 천연두』). 의학지식이 없던 시절에도 국가 책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치수(治水)와 전염병은 국가책임이다. 관개시설과 물 관리는 정부 몫이며,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 방역에 국가가 나서는 것은 문명의 명령이다. ‘군주와 지방관이 주체’라는 ‘국조오례의’의 규정처럼 대통령을 정점으로 정치인·행정관료·지자체장이 책임져야 한다. 엉성한 국가관리망을 벗어난 수퍼 전파자가 병원을 활보하던 지난 27일 정치권은 ‘시행령 개정안’을 두고 설전을 벌였고, 복지부 고위층은 외유 여독을 푸느라 ‘메르스?’ 정도였을 것이다. 26일 국무회의 보고에도 긴장은 없었다. 최고 의사들이 놓친 수퍼 전파자가 비의도적 세균 살포를 거의 완료한 29일 저녁, 국가는 한 통의 전화로 그 존재를 드러냈을 뿐이다. 국민안전처? ‘조심하라’는 문자가 다였다.

 29일 밤, 삼성서울병원에 비상이 걸렸다. 그때부터라도 관민 협동작전을 벌였더라면… 후회막급일 거다. 정부는 안일했고, 삼성서울병원은 과신했다. 1번 환자를 최초 판정한 송재훈 병원장은 감염학회 회장이다. 그는 세계보건기구(WHO) 권고에 따라 2m 내 접촉자를 일일이 확인해 밤샘 격리작업에 돌입했다. 의료진 2000명 중 600여 명을 격리 조치했고, 중환자와 위급 환자를 격리병동으로 옮겼다. 3000여 명의 접촉자 명단을 만들어 알렸다. 바이러스는 그 2m 벽을 뚫었다. 의사와 간호사, 일시 방문객도 놓쳤다. 어느 방송이 ‘주의하라’고 이른 응급실 이송요원과 구급차요원도 놓쳤다. 그 여파가 부산·창원까지 미쳤다. 국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삼성서울병원은 대역죄인이 됐다.

 그럼, 지자체는 있었나? 야밤에 경보사이렌을 울린 박원순 시장, 그 덕에 대선주자 1위로 등극한 박 시장의 공(功)은 분명하다. 잠자는 정치권을 깨웠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의 후련한 정치적 행보에 행정적 후속조치가 빈약한 것을 두고 역풍이 불 기세다. 재건축총회 참석자 신상정보 공개, 서울의료원 진료 거부 등 두어 차례 실수도 했다. 정부는 격리자 생계비 지급 대책을 서둘러 내놨다. 서울시는? 생필품은커녕 전화도, 조언도 없었다는 사람이 속출했다. 경기도 남경필 지사가 조용하고 빠르게 민관협동네트워크를 구축한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지자체와 민간의 자발적 협업을 조용히 끌어내는 리더십이 더 절실하다. 그렇다고 이런 와중에 어느 의료단체가 시장을 고발한 것은 낯 뜨겁다.

 후쿠다 게이지 WHO 평가단장의 말은 뼈아프다. ‘한국 의료진이 메르스 바이러스를 잘 몰랐고, 발생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 지난 4월 말 복지부는 메르스 관련 회의를 한 차례 열었다고 한다. ‘주의합시다’ 정도였을 것이다. 국내 메르스 전문가는 두어 명, 전염병 관리 총본부인 질병관리본부엔 군역을 때우는 공중보건의로 메워져 있다. 왕과 지방관이 수차례 여제를 지냈던 그때보다 국가적 관심은 훨씬 못한데, 바이러스 역귀는 날로 사악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믿을 건 당신들뿐, 메르스와 말없이 싸우는 의료진 말이다. “언젠가 나에게 올 거라고 생각했다.” 조준성(국립중앙의료원) 센터장의 말은 감동적이었다. “저승사자를 물고 늘어지겠다.” 김현아 한림대 동탄병원 간호사의 말은 눈물겨웠다. “그래도 끝까지 환자 곁을 지킨다.” 최모 삼성서울병원 중환자실 간호사의 결의는 아름다웠다. 이들이 있는 한 우리는 조선 백성처럼 호열자를 피해 태백산맥을 넘어 피난가지 않아도 된다. 공공의료와 협업, 시민동참의 중요성을 깨우친 것, 메르스 사태가 남길 뼈아픈 반성문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