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3兆 적자내고도 北송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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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000년 6월 열린 남북 정상회담 직전 현대건설은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해외 공사비'로 위장하면서까지 무리하며 1억5천만달러를 북한에 보낸 사실이 3일 드러났다.

이에 따라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회사 사정을 무시하고 서둘러 대북송금을 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한층 설득력을 얻게 됐다.

특검팀은 "이기호(李起浩)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대북송금 일주일 전 이근영(李瑾榮)당시 산업은행 총재에게 현대건설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산업은행의 자체 검토에서 "현대건설은 현금 대출이 곤란하고 현대상선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와 산업은행은 4천억원을 현대상선에 대출해줬다.

하지만 현대건설은 현대상선 대출금 중 1천억원을 떠안았으며 거기에 공사대금 6백72억원까지 끌어모아 북한에 보내야 했다.

한 금융기관 관계자는 "현대건설은 나중에 현대상선의 기업어음(CP) 매입자금 1천억원을 부동산 처분 등을 통해 서너 차례에 걸쳐 갚으며 고생했다"며 "이렇게 무리하며 보내야 했던 이유는 정상회담 성사 목적이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다"고 했다.

현대건설의 감사를 맡은 삼일회계법인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2000년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그해 현대건설의 당기순손실은 2조9천8백억원에 달했다.

특검 관계자는 "현대건설이 당시 유동성 위기에 있었음에도 정상회담을 위해 무리하게 돈을 끌어모아 북한에 보내 회사와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북 송금액을 해외 공사비로 위장하고 여러 나라의 북한 은행 등의 계좌로 분산해 보낸 것은 당시 현대건설의 송금이 국가정보원이 주도한 현대상선의 2억달러 송금 못지 않은 치밀한 기획을 통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현대건설은 해외 공사비를 보내기 위해 수시로 이용해온 계좌가 있었기 때문에 국정원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1억5천만달러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상선의 경우 관련 당국에 노출되지 않도록 거액을 해외로 보내는 것이 어려워 국정원의 도움을 받았지만 현대건설은 이미 해외송금 루트가 확보돼 있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돈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현대건설의 대북 송금액 중 일부가 현대상선의 송금액과 마찬가지로 은행 휴무일 등이 겹쳐 정상회담 개최 예정일이었던 6월 12일에야 북한 계좌로 들어간 부분 역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북한이 6월 12~14일 개최할 예정이었던 정상회담 일정을 6월 13~15일로 연기한다고 일방 통보한 이유가 송금 지연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강인식.임장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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