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환의 유레카, 유럽] 영국, 남느냐 떠나느냐 … EU와 ‘브렉시트’ 힘겨루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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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머런 총리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지난 12일(현지시간) 영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AAA(트리플A)에서 강등될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향조정 이유로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가능성을 들었다. 지난 5월 영국 총선에서 예상밖의 압승을 거둔 집권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공약대로 2017년까지 영국의 유럽연합(EU)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S&P는 “영국이 국민투표를 하기로 한 것은 금융 서비스와 수출, 경제 전반의 성장 전망에 위험요소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디스와 피치는 이미 영국의 트리플A 등급을 낮췄다.

 영국의 국민투표 일정이 가시화하면서 그 결과가 영국은 물론 EU와 세계경제 그리고 국제정치에 미칠 영향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지고 있다. 영국 국내에서는 찬반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으며, 영국과 EU 회원국 간에는 힘겨루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영국 의회는 지난 9일(현지시간) 국민투표 시행 법안을 표결해 찬성 544표, 반대 53표로 승인했다. 국민투표 입법화를 위한 1차 관문이었다. 유권자들에게 물을 질문으로는 “영국이 EU 회원국으로 남아있어야 하는가”가 선택됐다. 국민투표는 2017년 예정된 프랑스 대선과 독일 총선을 피해 이르면 내년 5월 실시될 수도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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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머런 총리는 EU를 상대로 영국의 정책 주권을 강화하는 협상을 벌여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EU협약을 개정하려고 한다. 협상에서 원하는 결과를 끌어내면 영국 정부 차원에서 EU 잔류 입장을 정하고 국민투표에서 잔류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 캐머런 총리는 EU 회원국들에 제시할 협약 개정의 ‘쇼핑리스트’를 아직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총선 기간 ▶EU 역내 이민자에 대한 복지 혜택 제한 ▶EU 차원의 입법을 막을 수 있는 영국 의회의 권한 확대 ▶EU 차원의 규제 완화 ▶추가적인 EU 통합 조치가 마련될 경우 영국의 선택권 확보 등을 공약했다. EU의 기치인 ‘어느 때보다 더 긴밀한 연합(ever-closer union)’에서 벗어나 영국의 주권행사 자율권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오는 25일 브뤼셀에서 열리는 EU 정상회의에서는 영국의 EU협약 개정 요구사항들이 정식 의제로 채택될 예정이다.

 캐머런 총리는 지난 5월 총선에서 예상 밖의 압승을 거둔 뒤 EU 회원국들을 상대로 순방외교를 벌이며 협약 개정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나서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로부터는 “정말로 필요하다면 협약 개정을 검토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끌어내기도 했다. 가장 큰 과제는 실제 EU와의 협상에서 체면치레를 넘어 의미있는 양보를 끌어낼 수 있느냐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최악의 경우 ‘치킨 게임’ 양상이 전개될 수도 있다. 캐머런 총리와 EU가 서로 한 발도 양보하지 않고 현상태를 유지한다면 브렉시트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메르켈 총리는 “넘어선 안 되는 기본원칙들과 ‘레드라인’(한계선)이 있다”며 “이는 유럽 내 무역과 이동의 자유”라고 말한 바 있다. 캐머런 총리가 이 레드라인을 넘으려 할 경우 EU로서도 물러서기가 어렵게 된다. 실제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가 결정될 경우 영국이 받을 타격은 예상보다 훨씬 클 수 있다. 당장에 최대 수출시장인 EU는 물론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나라들의 시장을 잃는 등 EU와 영국 경제 모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독일 베르텔스만재단은 영국이 EU를 탈퇴할 경우 2030년 국내총생산(GDP)이 2014년에 비해 14%가 줄어들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캐머런 총리를 자문하는 런던 싱크탱크 ‘오픈 유럽’은 이보다는 충격이 훨씬 적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탈퇴 후 EU와의 자유무역관계를 새로 맺고, EU의 규제에서 자유로와지면 오히려 플러스 성장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EU협약 개정은 전체 회원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따라서 영국 국민투표가 실시되기 전까지 이 절차를 모두 마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캐머런 총리의 개정 요구에 대한 다른 27개 EU회원국들의 반발도 거세다. 특히 동유럽 회원국들은 이민규제에 대해 민감하다.

 하지만 EU로서도 캐머런 총리와 영국의 요구를 마냥 도외시할 수는 없다. 경제대국인 영국이 빠져나갈 경우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국이 없는 EU는 크게 약해질 게 분명하다. 아직은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라 결과를 예상하기가 쉽지 않지만 공멸을 피하기 위해서는 양측이 서로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

 캐머런 총리로서는 산넘어 산이다. EU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낸다 하더라도 국내의 반EU 세력과 맞서야 한다. 스코틀랜드국민당·영국독립당 등 야당은 물론이고 필립 해먼드 외무장관, 마이클 고브 법무장관 등 보수당 내 강경파도 설득하거나 맞서 싸워야 한다.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는 섣불리 예상하기 힘들다. 최근 퓨리서치센터 여론조사에서는 영국인 55%가 EU 잔류에 찬성, 45%가 탈퇴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년 전보다 9%포인트, 지난해보다 5%포인트 높은 수치다. 국민투표가 실시된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초기에 ‘EU헌법’에 대한 찬성이 많았지만 막판에 반대가 우세해 결국 부결됐다. 영국에서도 아직까지는 탈퇴 반대자가 많기는 하지만 브렉시트가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있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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