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미 나흘 앞두고 … 윤병세·케리 통화 후 전격 연기 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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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전 11시30분, 김성우 청와대 홍보수석이 기자실에 나타났다. 김 수석은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를 연기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기자실이 술렁였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인해 일정을 단축할 거라는 전망은 있었지만 통째로 미루는 데 대해 청와대 내에서도 부정적 기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 수석이 나타나기 30분 전에도 “고열 증상이 있으면 공군 1호기(대통령 전용기) 탑승이 어렵다”고 기자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연기를 결심한 건 이날 아침이었다고 한다. 전날까지 ‘가야 한다’ ‘가지 말아야 한다’는 보고서가 수없이 올라갔고, 박 대통령은 이를 놓고 밤늦게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날이 밝은 뒤 박 대통령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윤 장관이 존 케리 미 국무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방미 연기 방침을 알린 게 오전 8시쯤이었다고 한다. 윤 장관은 케리 장관에게 국내 상황을 설명했고, 케리 장관은 “충분히 이해하고 박 대통령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답했다고 정부 관계자들은 전했다.

 청와대는 연기를 결정한 이유로 ‘국민 안전 최우선’을 강조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메르스 확산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래도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상황에서 자리를 비우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권에선 민심 악화가 박 대통령의 결심을 굳혔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초기 대응 미숙이 메르스 확산의 원인이 된 만큼 박 대통령이 순방길에 오를 경우 여론이 악화될 가능성이 크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세월호 사건의 트라우마도 연기의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며 “세월호 사고 후 국민안전처를 출범시킨 박 대통령으로선 메르스 확산만큼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태도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사건 한 달여 만인 지난해 5월에도 국익을 앞세워 원전 행사 참석을 위해 초단기 일정으로 아랍에미리트(UAE) 순방길에 올랐지만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산적한 국내 일정도 부담이었다고 한다. 당장 황교안 총리 후보자 임명동의안 처리, 국회법 개정안 논란 등 박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할 현안이 쌓여 있다.

 문제는 연기가 불러올 파장이다. 외교가에선 한·미 관계에 악영향을 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양국 간 협의가 있었지만 국내 사정으로 정상회담을 연기한 건 외교 결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박인휘(국제관계학) 교수는 “국가 간 약속을 여론에 쫓기듯 결정한 측면이 있다”며 "다소 외교적 부담이 생겼지만 기왕 결정을 내렸으니 한·미가 협조할 트랙과 한국이 독자적으로 해법을 찾을 외교 사안을 분리해 고민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남은 과제는 얼마나 빨리 방미 일정을 다시 잡을 수 있느냐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북한의 도발 위협, 미·일 관계 등을 감안하면 가능한 한 조속히 방미 일정을 잡도록 미국과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주변국의 정치 일정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8월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종전 70년 담화 발표가 있고, 9월에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미국 방문, 창설 70주년 기념 유엔 총회 등이 예정돼 있다. 국립외교원 김한권 교수는 “아베 담화를 들어본 뒤 9월께 미국에 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대통령이 중대한 결심을 한 만큼 다양한 해석과 비판을 내놓기보단 메르스 사태를 극복하는 데 온 국력을 쏟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지금 상황을 보면 잘한 결정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신용호·유지혜 기자 nov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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