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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은 외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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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논설위원

나는 정치인이, 그것도 여당 중진 국회의원이 그렇게 진지하게 환율을 걱정하는 건 처음 봤다. J의원은 얼마 전 사석에서 “환율이 제일 걱정”이라며 “제발 환율 신경 좀 쓰라”고 동석한 경제 관료를 다그쳤다.

 “이대로 가면 내년 총선에 싹 물갈이 된다. 환율 전쟁에 휘말려 수출 기업 망가지고 경제 확 가라앉으면 끝이다. 그땐 야당이 아무리 헛발질해도 여당이 이길 수 없게 된다. 정치인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지금은 정치 리스크보다 경제 리스크가 더 크다.”

 그러면서 그는 “환율 외교에 관한 한 아베보다 못한 박근혜 대통령이 여당에 가장 큰 악재”라고 꼬집었다.

 도대체 환율이 어쨌길래 그러나. 실상은 J의원의 걱정보다 더 걱정스럽다. 최근 2년간 주요 통화 중 가장 많이 오른 게 원화 값이다. 엔화는 원화에 비해 60% 넘게 떨어졌다. 그만큼 우리 수출 기업엔 타격이란 얘기다. 이런 수치만으론 감이 잘 안 온다. 피부에 와 닿게 현대차 주가를 예로 들어보자. 원화 가치가 오를수록 현대차는 매출이 줄고 수익성이 나빠진다. 당연히 주가도 떨어진다. 지난 2일 현대차 주가가 딱 그랬다. 14만원 밑으로 추락했다. 5년 만에 처음이다. 하루 하락폭 10.36%, 두 자릿수 급락도 4년 만이다. 하루 새 시가총액이 3조5000억원가량 사라졌다. 정몽구 회장 돈, 개미투자자 돈 구분 없이 공중분해된 것이다. D증권사 애널리스트 A는 현대차 눈치가 보이니 익명을 써달라며 말했다.

 “외국인들이 (주식을) 던지다시피 했다. 환율 때문이다. 현대차가 감내할 수 있는 한계에 달했다고 본 것이다. 주가가 더 떨어질지, 여기서 멈출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의 환율 흐름을 되돌리지 못한다면 적어도 현대차 주가가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개인적으론 ‘환율 민주화’에 찬성하는 쪽이다. 외환위기 이후 20여 년간 낮은 원화 값의 이득을 주로 수출 대기업이 챙겨갔다. 기업 소득에 비해 개인 지갑은 덜 채워졌다. 국민이 구매력을 희생해 수출 기업을 도왔지만 돌아온 건 ‘기업-개인 양극화’였던 셈이다. 이를 되돌릴 ‘환율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쪽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뭐든 과유불급이다. 지금의 원화가치 상승은 속도와 폭이 너무 가파르다. 국내총생산의 절반이 넘는 수출이 죽을 쑤면 우리 경제엔 답이 없다. 내수를 아무리 활성화한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의 경제가 확 좋아질 수는 없다. 내수도 수출이 버텨준 다음의 얘기다. 대안은 뭔가. 전 청와대 고위 관계자 J는 ‘환율 외교’를 주문했다.

 “일본은 대표적인 환율 조작국이지만 미국의 ‘용서’를 받았다. 엔화 가치가 달러당 125엔까지 떨어지는 건 미국의 용인 없인 불가능하다. 환율 외교야말로 경제 외교 중 최고의 외교다. 잘못해서 한 번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되면 회복할 수 없다.”

 그는 최근의 워싱턴 분위기가 “무척 안 좋다”고 전했다. 한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난데없이 한국의 외환 방패 3종 세트가 외환 조작 우려가 있으니 폐지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도 그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간 앞에서 대신 맞아주던 중국 방패도 사라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말 중국에 대해 “환율 시스템 개혁이 긍정적”이라며 “위안화 저평가가 해소됐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주요 타깃이던 중국이 이렇게 빠져나가면 남는 건 한국뿐이다. 중국은 그나마 힘이 세서 미국이 엄포만 놨지만 한국에 대해선 본보기로 힘을 과시할 수도 있다.

 최대한 방어논리를 만들고 안 되면 읍소라도 해야 한다. 지난해 경상 흑자 892억 달러 중 약 600억 달러가 대중 흑자다. 대미 흑자는 그 절반밖에 안 된다. 우리 경상 흑자가 대중국, ‘불황형 흑자’며 대미 흑자가 꼭 환율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제대로 설득해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려야 한다. 다음 주말엔 대통령이 미국을 찾는다. 환율 외교가 본격적으로 시험받을 것이다. 파이팅을 기대한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