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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메르스’를 놓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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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우리 보건당국에 따르면 전염성이 낮은 대수롭지 않은 질병이었다. 보건당국이 첫 의심환자 신고를 받고도 36시간이나 뭉갠 건 그래서인지 모른다. 한데 메르스 첫 환자 발병 후 감염자는 확확 늘어난다. 사망자도 나왔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초동대처가 미흡했다”고 사과했다. 구체적으로 초동대처를 어떻게 잘못했다는 건지 좋은 초동대처는 어떤 것인지는 얼버무린 두루뭉술한 사과였다.

 “국제적으로 매뉴얼화된 ‘사전예방대응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을 우리 보건당국이 지키지 않았다는 게 잘못이다.” 예방의학 전문가 최재욱 고려대 의대 교수는 잘못을 이렇게 지적했다. 세계보건기구(WHO) 기준이나 공중보건학 교과서에 나온 원칙은 이렇단다. 전염병은 0.1%의 가능성만 있어도, 과학적으로 명확하지 않고 다소의 인권침해가 있더라도 정부가 개입해 격리 등의 조치로 확산을 막아야 한다. 질병의 치료에는 본인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예방이 목적일 때는 불확실한 상황이라도 본인 동의와 상관없이 즉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거다.

 한데 우리 보건당국은 ‘담대’했다. 병원의 의심신고에도 ‘아닐 테니 다른 검사나 해보라’고 했고, 스스로 이상 증상을 호소하며 격리를 요청하는 환자도 돌려보냈다. 건성건성한 역학조사로 감염자가 중국으로 건너가 민폐를 끼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뉴얼을 무시한 초동대처는 이렇게 잘못된 방향으로만 달렸다. 그럼 그 이후 조치는 제대로 하고 있을까. 불행하게도 믿음직한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먼저 ‘자가격리’. 예방의학적으로 볼 때 자가격리는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의사 출신인 김용익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가·시설 격리를 나누는 기준은 없다. 100% 시설 격리를 하라”고 촉구했다. 집은 가족이나 외부와의 접촉 가능성이 있는 주요 전파통로여서 격리 장소가 안 된다는 것이다. 한데 어제 최경환 총리대행이 주재한 메르스 관련 관계장관회의에선 ‘괴담에 대한 선제적 대응’ ‘국가적 보건역량 총동원’ 등 허무한 논의만 오갔다. 뒤이은 복지부 대책도 ‘특정 요건 해당자 시설격리 유도’ ‘지원방안 강구’ 등 한가하다. 구체적 격리 방식과 지원책 같은 맞춤형 대책을 기대한 국민 입장에선 ‘봉숭아학당’을 보는 느낌이다.

 보건당국은 몰라서 시설격리에 인색한 걸까. 실은 인프라가 없어서다. 보건당국은 이제야 ‘접촉자 집단격리수용 공간’을 마련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란다. 우리나라 전염병 격리 지정 병원은 모두 17개, 격리치료를 할 수 있는 음압병상은 105개에 불과하다. 또 이들 대부분이 민간병원이다. 전염병환자를 수용하면 다른 환자들이 오지 않는다. 심하면 2주 정도 병원 문을 닫아야 한다. 한데 이에 대한 피해보상 규정이 없다. 병원이 고스란히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메르스를 계기로 우리가 알게 된 건 우리나라엔 아예 전염병 대응 시스템이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에볼라 바이러스 공포가 아직도 생생하고, 해외발 바이러스 방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법석을 떨었는데도 실제론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

 이제 우리가 기대할 건 보건당국이 주장하듯 메르스가 감염성과 변형 가능성이 낮은 ‘착한 바이러스’로 남는 것뿐이다. 이에 최 교수는 말했다. “변형 가능성이 낮다는 주장은 소송이나 법적 분쟁에서 의학적 증거를 대야 할 때나 쓰는 말이다. 보건당국의 예방 차원에선 변형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된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비하지 않으면 예방조치는 모두 무력화된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매뉴얼도 무시하는 보건당국. 질병 대책보다 괴담에 대한 선제적 대응에 골몰한 관계장관회의. 아직도 ‘강구’ 중인 부실한 질병관리 시스템. 이게 질병이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