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여대생 살인사건 무죄' 17년 만에 항소심서 무기징역 구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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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은 호주 어학연수를 준비 중이었고, 영어 공부가 하고 싶어 스리랑카 근로자 3명과 처음에 술을 같이 마신 것이다."

오는 8일 항소심 결심공판을 앞둔 1심에서 무죄 선고된 17년 전 장기 미제인 대구 여대생 정모(당시 18세)양 살인사건. 검찰이 그동안 규명하지 못했던 새로운 공소 사실을 앞세워 무기징역 수준의 중형을 구형할 방침인 것으로 확인됐다.

김영대 대구지검 차장검사는 3일 "항소심 유죄 입증을 위해 1심에서 규명하지 못했던 사건 당일 6시간(오후 11시~다음날 오전 5시)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며 "수사 결과 항소심에서도 무기징역 같은 중형 구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열린 1심에서 재판부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검찰이 2013년 9월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구속 기소한 스리랑카 근로자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사건 수사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풀리지 않는 3가지 의문이 있었던 게 무죄 선고의 배경으로 봤다. ‘왜 정양이 당시 범인들과 술을 같이 마셨고 반항 없이 4㎞ 떨어진 구마고속도로 밑 사건 현장까지 갔는지’ ‘어떻게 먼 거리를 이동했는지’ ‘성폭행 직후 왜 고속도로 쪽으로 달아나는 정양을 범인들은 그냥 놔둔 것인지’ 등이었다.

보강 수사 결과 정양은 당시 3개월쯤 뒤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영어를 잘하는 스리랑카 근로자 A씨가 사건 당일 오후 11시쯤 접근했고 영어 대화를 하기 위해 정양이 술을 같이 마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항이 불가능한 만취상태인 정양을 A씨가 자전거 앞에 걸터 앉혀 사건 현장까지 데려갔다는 게 검찰 수사 결과다.

이때 스리랑카 근로자인 공범 2명도 각각의 자전거를 따로 타고 A씨의 자전거를 뒤따랐다. 검찰은 "영어를 배우려는 정양에게 일부러 A씨 등이 접근해 술을 먹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폭행 직후 정양은 범인의 손을 뿌리치고 고속도로 쪽으로 달아났다. 이때 범인들은 정양을 붙잡지 않았다. 정양의 가방에서 찾은 신분증으로 당시 미성년자인 18세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처벌이 무서워 못본 척하고 도주했다는게 검찰의 설명이다.

검찰 관계자는 "스리랑카에서 미성년자 성폭행은 중형에 처해지며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고 전했다.

이런 정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A씨 등이 정양의 가방에서 책 3권과 신분증·현금을 빼갔다는 것을 확인했고, 실제 이 책 3권이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됐다는 것까지 수사해 항소심 공소장에 담았다.

검찰은 항소심에서 유죄를 기대하고 있다.

물적 증거는 1심 때와 마찬가지로 없다. 그러나 형사소송법에 있는 '특신 상태(형사소송법에 있는 전문 증거력이 있는 믿을 수 있는 상태)'의 증인 진술로 17년 전 6시간을 발굴해 공소장에 모두 담았기 때문이다. 증언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증인을 지난달 비공개로 2차례나 재판부 앞에 세우기도 했다.

검찰 측 증인은 외국인으로 범죄 전력이 없고 1990년대 중반부터 대구에서 기업체 간부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항소심 재판부가 유죄를 선고하면 2001년과 2005년 스리랑카로 각각 돌아간 또 다른 범행 가담자 2명에 대해서도 국내 소환 작업에 들어갈 방침이다.

◇부정(父情)이 딸의 억울함을 푼 사건=정양 사건은 부정(父情)이 딸의 억울함을 풀었다는 사실로 주목을 받았다. 사건이 발생한 1998년 10월 당시 정양이 사망한 고속도로 부근에서 여자 속옷이 발견됐지만 경찰은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다.

이후 정양의 아버지는 생업까지 제쳐두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재수사를 촉구했다. 항고·재항고·헌법소원에 진정·탄원, 경찰관 고소까지 하면서 악성 민원인이라는 꼬리표까지 달았다고 한다.

재수사에 나선 검찰은 2013년 9월 공소시효가 15년인 특수강도강간죄의 시효 만료를 한 달 앞두고 스리랑카 근로자 A씨를 찾아내 구속 기소했다. 1998년 10월 고속도로 인근에서 발견된 정양의 속옷에서 A씨의 DNA가 나와서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A씨는 항소심 공판에서도 계속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대구=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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