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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행] 1. 생활의 거품 빼고 또 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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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일본에선 버블 붕괴(1991년) 이후의 세월을 지칭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한다. 심지어 '제2의 패전''삼류국가로 전락했다'는 자조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버블이 한창인 80년대 '미국을 이겼다''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며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던 일본은 이제 없다. '재팬 이즈 넘버 원'(일본이 1등), '대표적인 성공시스템'이라던 다른 나라의 칭송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일본은 이제 부러움이 아니라 닮지말아야 할 경계의 대상이다. 10년 불황의 탈출구를 찾으려는 정부.사회.개인의 몸부림 속에 일본은 변하고 있다. 달라지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10차례로 나누어 들여다본다.

일본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T자산운용사의 수석애널리스트 다나카 신스케(田中神助.39). 그는 지난주 양복 한벌을 구입했다. 정확히 10년 만이다.

1988년 입사한 이후 93년까지는 거의 매년 긴자(銀座)의 백화점에서 15만엔(약 1백50만원)이 넘는 이탈리아제 알마니 양복을 사 입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동네 할인점의 3만엔짜리다. 6년 전 골프도 끊은 처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의 월 수입은 40만엔. 이 중 ▶월세 11만엔▶전기.가스.수도료 9만엔▶전화비 3만엔 ▶식비 5만엔▶큰딸(6살) 유치원비 4만엔▶전철 정기권 2만엔이 고정적인 지출이다.

그동안 생활의 '버팀목'이 됐던 보너스도 지난해 말부터 없어졌다. 결국 한달에 임의로 쓸 수 있는 돈은 6만엔에 불과하다. 내년부터는 둘째 딸도 유치원에 보내야 한다.

이런저런 계산 끝에 다나카는 올 초부터 1주일에 한두번 하던 술자리를 한달에 한두번으로 줄였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창고에 고이 보관하던 골프채도 후배에게 넘겼다.

도쿄 아카사카(赤坂)에서 13년째 이발소를 경영하는 사세 아키라(佐瀨明.36). 그도 사는 게 빡빡해지긴 마찬가지다. 10년 전만 해도 하루에 30명 가량 되던 손님이 요즘은 10명 내외다.

그래서 3~4년 전부터는 가급적 손님들 이발을 짧게 하지 않는다. 자주 이발소를 찾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손님들은 "더 짧게, 더 짧게"를 외치며 '신경전'을 벌인다고 한다.

M전자업체 관리부장인 오자키 히토시(尾崎仁.44). 예전엔 1차 불고기집, 2차는 긴자의 입장료 2만~3만엔짜리 고급 룸살롱, 3차는 긴자의 또 다른 고급 룸살롱을 전전했다.

과장 때인 90년 초까지만 해도 그런 회식자리가 1주일에 서너번이었다. 새벽에 집에 갈 때 택시비가 9천엔(약 9만원)이 넘었지만 회사비용으로 처리됐다. 그러나 요즘은 중저가 선술집 1차가 끝이다.

오후11시가 넘어서면 전철 막차를 놓칠까봐 모두들 역으로 달려가기 바쁘다. 기업들마다 교통비.광고비.교제비 등 이른바 '3K'에 대한 지원을 확 깎아버렸기 때문이다.

도쿄의 대표적인 유흥가인 아카사카에서 16년째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A씨는 "한창 경기가 좋을 때 매일 오던 손님들은 2주에 한번, 1주일에 한번 오던 손님들은 한달에 한번, 그리고 한달에 한번 오던 손님들은 아예 모습을 감췄다"고 말했다. 한 종업원은 "요즘은 옆에 앉은 여종업원에게 술도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반면 '절약형' 공간들의 인기는 높아졌다. 지난달 24일 오후 도쿄 외곽의 가사이 린카이(葛西臨海)공원. 순환도로 인터체인지에서 공원입구까지의 1km 남짓한 거리를 가는 차 안에서 무려 1시간30분을 지체했다.

데이트나 주말외출로 '돈 안 드는'곳을 찾는 이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이곳을 찾은 회사원 곤도 신이치(近藤愼一.36)는 "버블 때는 헬리콥터를 타고 도쿄 인근을 도는 데이트 상품이 5만~10만엔이었지만 몇시간을 줄서야 탈 수 있었다"며 "참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호주머니가 얇아진 일본인들의 소비문화가 변하고 있다. 필요없는 씀씀이를 자제하고 스스로 소비설계를 견실화하는 '거품 빼기가 일상화'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개인수입의 감소다.

예컨대 40대 중반의 은행 지점장급은 평균 연봉이 90년 2천만엔에서 지난해 1천만엔 아래로 뚝 떨어졌다. 자산규모 세계 제1위인 미즈호 은행의 마에다 데루노부(前田晃伸.58)사장의 연봉은 8천만엔에서 2천5백만엔으로 급락했다.

일본 공무원들도 사상 처음으로 기본급이 삭감되는 봉변을 당했다. 수입이 줄면서 세계 제일을 자랑하던 일본의 저축률은 90년 15%대에서 지금은 6%대로 떨어졌다.

또 하나 '짠돌이 문화'가 자리잡은 데는 '더 이상의 고도성장은 없다'며 현실을 수용하는 일본인 특유의 의식구조도 작용했다.

가나가와(神奈川)현에 사는 주부 도시마 게이코(豊島慶子.34)는 남편 월급이 20% 깎인 재작년부터 의류.식품을 살 때 반드시 자전거로 30분거리인 친구네 회사 '사원 할인매장'을 이용한다. 하지만 '처량하다'는 생각보다는 '시중가격의 50%에 샀다'는 뿌듯함이 훨씬 크다고 한다.

취업정보업체인 리크루트의 도미즈카 스구루(富塚優)편집장은 "올해 대졸 신입사원의 평균 초임은 21만엔으로 90년(20만엔)과 거의 같지만 '불만을 느낀다'는 응답자는 거의 없다"며 "이는 '더 받아야겠다'는 의식보다 '이 정도 받으면 됐다'는 의식이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게이오(慶應)대 가네코 마사루(金子勝.경제학)교수는 "나쁘게 얘기하면 일본 사회가 '빈곤에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리즈너블(reasonable)'과 '마이 스탠더드(my standard)'를 중요시하는 시스템으로 전환됐다고 보는 게 맞다"고 분석했다.

도쿄대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교양학)교수는 "어렵기는 하지만 일자리가 있고 빚만 없으면 생활의 질은 떨어지지 않는 구조가 이미 형성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생활에 필요한 인프라가 모두 갖춰진 선진사회로 들어선 만큼 수입이 조금 줄어도 큰 흔들림이 없는 사회가 됐다는 지적이다.

실제 버블이 꺼진 후 다양한 눈높이의 유통 형태가 생겨났다. 예컨대 1백엔 숍→저가 수퍼→일반 수퍼→고급 수퍼→백화점 수퍼 등에 따라 같은 품목이라도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쌀도 백화점.고급 수퍼에서는 5㎏에 4천2백~5천엔짜리 오리지널 브랜드 제품을 취급하지만 저가 수퍼에서는 1천엔대 쌀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이 같은 거품 빼기의 일상화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대표적인 게 "자식은 버블', 나아가 "결혼조차 버블"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이다. 도쿄가쿠게이(東京學藝)대학 야마다 마사히로(山田昌弘.교육학)교수는 "결혼이나 애가 싫다기보다 미래가 부담스럽다는 이유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초등학교 학생수는 90년 9백37만명에서 지난해는 7백10만명으로 4분의1이 줄었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젊은 연령층 인구의 감소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도쿄=오대영, 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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