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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전집 사지 마세요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레몬트리] 아이를 낳으면 으레 전집을 들이는 것이 보통 한국 엄마의 상식이다. 아이 책만큼은 빠짐없이 고루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반면 유럽의 출판계에는 한국 스타일의 전집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차이가 의아했다. 어쩌다 우리는 아동도서 전집을 당연시하게 됐을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질문을 품고 제52회 볼로냐 아동도서전으로 향했다.

글쓴이 최혜진은… 잡지 에디터 시절, 누구보다 주도면밀하고 깐깐한 워커홀릭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일보다는 연애를 더 좋아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유럽으로 날아가 프리랜서 글쟁이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을 썼고, 네이버 ‘오늘의 책’,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외부 필자로 활동 중이다. www.radioheadian.com

발달 단계 덫에 걸린 한국 엄마들

나는 올해 서른넷이다. 결혼은 했고 아이는 없다. 그림책과 사랑에 빠진 건 유럽으로 이사 온 서른두 살 때부터다. “애도 없는데 왜 애들 책을 좋아해?” 궁금하실 것 같아서 자문자답을 해보자면, 한국에서 10년간 잡지 에디터로 일하며 경험한 그 어떤 예술 분야보다 뒤지지 않는 예술성이 그 안에 있단 걸 깨닫게 되어서다.

시작은 이랬다. 비밀스레 품고 있던 상처와 열등감을 만져주는 그림책을 만난 것. 눈물을 펑펑 쏟고 나니 마음에서 정화가 일어났다. 어떤 책에는 평생 품고 가도 좋을 인생의 열쇳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이 서른 중반의 생활에 닳고 닳은 어른도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그림책 안에는 대단한 위로와 지혜가 숨어 있었다. 애들용이니 어른용이니 하는 구분은 무의미했다.

유럽의 그림책 전문가들을 만나고 이곳 문화를 알게 될수록 전집 위주의 한국 시장이 몹시 기이하게 느껴진다. 사랑이 큰 만큼 마음이 아프다. 한국식 전집은 엄마들의 ‘다독에 대한 강박’과 ‘낙오에 대한 불안감’을 파고든 출판사의 기획물인 경우가 많다.

아이의 발달 과정 속속들이 모두 엄마가 알고 챙겨야 한다고 믿는 과도한 책임감, 똑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것보다 새로운 책을 많이 읽는 게 나을 거란 고정관념, 무엇보다 책이 선행 학습 도구로서만 기능하는 왜곡된 교육열, 궁극적으론 입시 지옥이 된 병들어버린 교육 시스템… 이런 복합적인 요소가 뒤섞여 전집 문화를 지탱하고 있다.

특히 ‘발달 단계’라는 단어는 홈쇼핑의 매진 임박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가장 잘 먹히는 마케팅 수단이다. ‘생후 몇 개월 차에 이런 책으로 무엇을 자극해주고, 그다음 시기엔 이런 개념을 잡아주는 책들을 읽혀야 합니다’라는 불안 마케팅으로 책을 파는 출판사 혹은 그런 식의 후기를 공유하는 엄마들의 문화는 프랑스와 벨기에엔 없다. 그건 각 아이의 개성과 고유한 리듬을 무시하는 주입식 사고인 데다 독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자발적 지적 탐험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프랑스 비평가 소피 반 더 린덴이 쓴 그림책 가이드북 『아이를 위한 책을 찾고 있어요』엔 이런 조언이 나온다. “만약 4세 아이가 신생아 책을 본다면 그건 퇴행이 아니라 그 순간에 아이 내면에 어떤 필요가 있는데, 그걸 그 책이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과도하게 의식하며 책을 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책은 모든 연령이 즐길 수 있으니까요.”

아이가 책을 많이 읽기 바라는 부모의 기대는 어떨까. 책이 그리 좋다면 기왕이면 다독이 좋지 않을까? 이 의문에 답을 준 건 프랑스 국립어린이도서센터의 디렉터 마리 라루에였다. “제가 어릴 땐 프랑스에서도 책이 참 귀했어요. 제 유년기와 비교하면 제 딸은 방대한 책에 노출되어 성장했죠. 하지만 딸아이가 좋아하고 반복해 읽은 책을 세어보면 열 권 내외예요.

사실 아이들은 그래요. 아무리 많은 책을 보여줘도 정말 각별하게 기억하는 건 열 권 정도죠. 그 열 권의 친구가 평생 가는 정서적 버팀목이 되는 것이랍니다. 유년기 아이는 똑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행위로 책과 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거든요.”

볼로냐에서 만난 여러 전문가는 이렇게 입을 모았다. ‘내가 고른 책이 혹여나 모자랄까봐’, ‘내 선택을 믿지 못해’ 여기저기를 기웃대는 엄마들, 본인이 족집게 주입식 교육으로 길러졌기에 그 외의 방법을 잘 모르는 엄마들, 사랑에서 시작했으나 결국 불안감에 흔들리는 엄마들의 여린 자존감까지 좋은 그림책이 어루만져줄 수 있다고 말이다. 엄마가 먼저 좋은 그림책과 사랑에 빠져보면 길이 보인다. 그 시작을 도울 조언들이 여기 있다.

볼로냐에서 묻다 “전집이 뭐 어때서요?”

불안 마케팅에 흔들리지 않는 심지 깊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전집을 둘러싼 출판계의 비화부터 책 고르기에 대한 엄마들의 고민 해결까지, 볼로냐 아동도서전을 찾은 아동도서계의 전문가들이 꼭꼭 씹어 입에 넣어준다.

1 노미숙&차예지 모녀
같이 그림책 이야기 하는 게 정말 좋아 볼로냐까지 날아온 열혈 모녀. 어머니 노미숙 씨는 20년 넘는 공력을 자랑하는 그림책 전문가로 ‘한국 그림책문화협회’에서 연구와 강의 활동을 하고, 딸 차예지 씨는 엄마와 그림책을 매개로 함께 대화했던 유년기 기억을 인생 최고의 자산으로 꼽는다.

2 북극곰 출판사 이루리 편집장
고려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초등학생 글쓰기 교사 양성 과정을 강의하면서 우연히 그림책에 빠져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직접 동화를 쓰고 출판사까지 차린 아빠계의 그림책 전도사. 그림책 『까만 코다』, 『북극곰 코다』와 비평서 『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을 썼다.

3 KBBY 국제아동청소년도서 협의회 김서정 대표
‘안데르센상’을 집행하는 국제적인 비영리단체 iBBY의 한국위원회 대표. iBBY는 유네스코나 유니세프처럼 독립적인 국제 기구로 전 세계 70여 개국에 지부가 있다.

4 그림책 작가 정유미
한국인 최초로 2년 연속 볼로냐 라가치상을 받은 화제의 주인공. 2014년에는 『먼지아이』로 뉴호라이즌 부문 대상을, 올해는 『나의 작은 인형 상자』로 픽션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림책 작가가 되기 전, 이미 세계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 수상’ 기록을 여럿 세웠던 괴력의 작가.

Q 전집 그림책을 사주는 게 왜 문제라는 건가요?
전집이라고 무조건 다 나쁘다, 질이 떨어진다라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문제는 초등학교 교과서와 연계됐다는 광고 문구나 ‘우리 아이 생활 습관’, ‘수리 능력을 위한’, 이런 식의 목적 의식이 분명하게 명시된 그림책들만 잘 팔린다는 점입니다. 전집 시장 규모가 연간 3조원이고, 팔리는 책의 80%가 학습 목적 시리즈들이에요. 이 쏠림 현상이 문제라는 거죠. 그림책의 본래 가치는 통합적인 예술 경험을 시켜준다는 데 있어요. 지금 한국 교육 시스템 안에선 학습과 예술이 분리되어 예술은 공부에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취급되는데요. 전통적으로 우리는 학문이 곧 예술인,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문인들의 나라였지요.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그 전통을 잃은 것이 문제겠지요. 김서정

Q 엄마들이 책으로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게 많아서 목적 의식이 분명한 책을 선호하는 것일 텐데요.
아이는 자동판매기가 아니에요. 생활 습관 동화를 넣는다고 생활 습관 좋은 아이가 나오고, 밝고 착한 책을 넣어준다고 밝고 착한 아이가 나오는 게 아니란 뜻입니다. 그림책 독서가 아이 내면에 일으키는 작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그림은 감성의 영역에서 즉각적으로 인지되고, 글은 이성의 영역에서 서사적으로 인지되는데 이 두 요소가 융합해 총체적으로 울림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예술품이죠. 그 정수를 모른 채 자동판매기처럼 아이와 책을 대하는 건 아닌지 되묻고 싶네요. 김서정

Q 학부모가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한국 분위기에서 그게 어디 쉽나요?
전집, 교구 사는 엄마들을 나무라는 게 아닙니다. 엄마들이 가진 ‘공부에 도움 되는 책 vs 안 되는 책’에 대한 고정관념이 오히려 아이들의 지적 성장을 방해해요. 스스로가 스스로를 학습시킬 줄 안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자기 주도 학습이겠죠. 이런 진정한 의미의 학습은 ‘애착’과 ‘모방 욕구’에서 시작됩니다. 아이들이 만화 보면서 따라 그리고 싶어 할 때가 있죠? “나도 해보고 싶어!” 이런 반응을 이끌어내는 모든 책들이 훌륭한 책이고 공부에 도움 되는 책입니다. 억눌렸던 표현 본능을 자극했단 의미거든요. 훌륭한 그림책들은 입, 손,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게 만들고, 따라 쓰거나 그려보고 싶게 만들어요. 이루리

Q 전집도 그림책은 그림책인데, 거기서도 예술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전집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답이 나옵니다. 한국 아동 전집 시장 안엔 출판기획사라는 회사들이 따로 존재해요. 얼마 예산 안에서 몇 권짜리 기획물을 만들어주겠다고 출판사에 제안을 해 예산을 따낸 뒤, 작가를 고용하는 회사예요. 전집 안에도 분명 좋은 책이 섞여 있긴 하지만, 완성도가 각각 한 권마다 발현되기 어려운 프로세스죠. 책이 미흡해도 마감 기일이 닥치면 그냥 내는 전집도 많으니까요. “무엇보다 작가가 의욕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도, 전집을 만들 땐 기획사가 작가의 개성 있는 상상력을 깎고 다듬어서 무난한 수준으로 만들지요. 시장에서 팔리는 책의 틀이 명확하니까요.” 이루리

Q 엄마들은 상상력을 맘껏 자극해주고 싶어 책을 대량으로 사들이는데, 정작 틀에 박힌 책이 잘 팔린다. 아이러니하네요.
작가로서 힘든 점 중 하나가 한국 독자들이 가진 그 틀이에요. 어린이 책은 밝고 아기자기해야 한다, 흑백은 안 되고 컬러가 낫다, 글 없는 책은 안 된다… 이런 기준에 라가치상을 받은 제 두 책은 다 부합하질 않아요. 사실 대상을 받은 『먼지아이』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요. 수년 전 한국의 대형 출판사 한 곳에서 출간 의뢰를 해서 계약서까지 쓴 적이 있었어요. 한 6개월쯤 진도가 나갔을 때, 출판사 측에서 책이 모호해 잘 안 팔릴 것 같으니 에세이집으로 바꾸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프로젝트를 엎을 수밖에 없었죠. 해놓은 것이 아까워서 독립 출판사를 차려 낸 책이었는데 그게 볼로냐에서 상을 받았어요. 시상식 때문에 볼로냐 도서전에 올 때마다 유럽 사람들이 어린이 책을 바라보는 자유로움과 실험 정신에 놀라요. ‘이런 건 애들이 이해 못해’ 하는 고정관념 없이 다양한 정서, 다양한 그림체를 아이들에게 노출시키는 것 같아요. 정유미

Q 아이들 보기에 너무 모호하다, 무섭다… 이런 이유로 엄마가 책들을 거르는 게 잘못된 건가요?
밝고 예쁘고 분명한 책만 보여주는 건 엄마가 아이를 반쪽 인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사는 게 밝고 명확하기만 한가요? 정체 모를 어두운 감정과 싸우기도 하는 게 인생이잖아요. 아이에게 예방 접종 왜 시키나요? 주사 맞을 때 아이가 아파하는데요. 그것과 같은 이치예요. 어둡고 모호한 그림책은 아이가 그런 감정을 느낄 때, ‘네가 그런 감정 느끼는 것 당연한 거야. 누군가도 그랬단다’라며 위로하죠. 감정의 면역력을 기르는 거예요. 김서정

Q 단행본 창작 그림책은 다양해서 고르기가 힘들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전집은 구성이 딱 되어 있으니 엄마들 고민을 덜어주는 것 아닌가요?
아이에게 평생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신적 양식을 남이 짜놓은 대로 들인다는 게 더 이상한 것 같은데요. 아이 이유식 만들 때, 많은 엄마들이 좋은 채소 구입하려고 노력하죠? 그림책 단행본에 입문하는 것은 딱 그 정도의 관심과 노력만 있으면 됩니다. 아이들 책은 음식 재료 고르는 것과 똑같아요. 요리할 때 재료를 바로바로 소량씩 사서 해 먹는 게 건강에 가장 좋잖아요. 아이랑 도서관, 서점에 가서 한두 권씩부터 시작하세요. 양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아이가 원치도 않는데 엄마가 알아서 한꺼번에 많이 쟁여두는 전집은 냉동 식품과 다를 게 없어요. 노미숙

Q 엄마 눈으로 보기에 아이들이 직접 골라오는 책은 신통치 않은 게 많지요.
그림책 시장의 독특성 가운데 하나가 구매자와 실제 콘텐츠의 소비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읽는 것은 아이들인데 구매자는 부모죠. 그림책을 보다 보면 부모들은 캐치하지 못하는 것을 아이들이 발견할 때가 많아요. 「이상한 화요일」을 그린 데이비드 위즈너 원화전에 갔을 때, 거기 계신 큐레이터분이 해주신 말이 있어요. 큐레이터인 자신조차 범인에 대한 힌트가 그림에 숨어 있는 줄 모르고 그냥 형식적인 설명을 했는데, 유치원생들이 관람을 와서 단박에 그림 속 상징을 읽어냈다는 거예요. 엄마가 잘 모르겠으면 그냥 실제 독자인 아이들을 믿으세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교육입니다. 노미숙

Q 아이가 그림만 많은 책을 보면 속상하고 걱정된다는 게 많은 엄마들의 생각인데요.
한국은 확실히 그림보다 글을 존경하는 문화가 있어요. 하지만 이미지 역시 일종의 언어입니다. 오히려 글자보다 즉각적이고 원초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죠. 인류의 언어가 모두 그림문자에서 시작된 걸 생각해보세요. 또 전 세계 어딜 가나 쉽게 이해되는 픽토그램이나 이미지 기호들도요. 이미지 언어에 담긴 상징을 잘 읽어내는 것도 좋은 재능 아닐까요. 전 어릴 때, 엄마에게 꾸중을 들어가며 몰래 만화책을 봤는데요. 죄책감에 시달려가면서요. 그때 본 만화책들이 작가로서 자산이 된 것 같아요. 정유미

Q 전집은 권당 가격이 싸서 경제적으로 느껴져요.
그게 전집 마케팅 비법 중 하나인데요. 결과적으로 전집으로 오히려 돈을 더 쓴다고 봐야 해요. 엄마가 아이와 직접 책을 고르면 권당 1만원 정도로 책을 소장하고 그 과정에서 대화도 나눌 수 있지요. 목돈을 들여서 완성도가 들쭉날쭉한 세트를 구입하고 엄마는 보지도 않아 아이와 대화할 수 없는 상황이 정말 ‘경제적’으로 느껴지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이루리

Q 단행본 그림책 정보를 얻을 곳이 워낙 없다 보니, ‘한국 작가 중엔 괜찮은 사람이 없지 않나요?’ 이런 질문이 나오기도 해요.
한국 창작 그림책 수준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삭막한 환경에서 이 정도의 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것이 기적적일 정도로요. 올해 세계 최고 권위의 볼로냐 도서전에서 라가치상 5개 부문을 석권한 나라는 한국과 프랑스뿐이었어요. 김서정 현명한 엄마들이 좋은 창작 그림책을 구입하고 힘을 실어준다면 출판사가 불안 마케팅으로 독자를 기만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창작 그림책을 무조건 사라는 게 아닙니다. 좋은 그림책을 고르는 눈 밝은 독자가 되어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루리

전집보다 먼저 챙겨줘야 할, 우리 창작 그림책

아이 보여주려고 꺼냈다가 엄마가 먼저 흠뻑 빠진다는, 마성의 한국 그림책. 이 한 권 한 권의 재미와 감동은 20권짜리 전집 한 질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의 추천을 받은 뒤, 에디터가 다시 한 번 엄선한 여섯 권의 책을 소개한다.

1『엄마 마중』 , 글 이태준 / 그림 김동성
첫 장을 펼치자마자 ‘아, 예뻐…’ 하는 감탄이 흘러나온다. 김동성 작가가 골목길을 그린 수묵화 한 점에 마음이 맑아진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엄마를 마중하기 위해 전차 정류장으로 나간 꼬꼬마 아기.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간절함이 글과 그림에서 향기처럼 풍겨나 마음에 내려앉는다. 엄마 입장에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본인의 유년기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엄마가 우주의 전부로 느껴지는 아이의 마음이 담겨 있다.

2『숲으로 간 코끼리』 , 글 / 그림 하재경
서커스단에서 일생을 고단하게 보낸 코끼리의 이야기. 날마다 가혹한 훈련을 견디며 어려운 동작을 익히던 아기 코끼리가 시간이 흘러 늙은 코끼리가 된다. 동물원에 팔아 넘겨질 처지가 된 코끼리의 소원은 한 번만이라도 철창을 벗어나 마음껏 숲 속을 뛰어다녀보는 것. 어느 밤, 요정의 도움으로 코끼리는 숲으로 가는데…. 여기까지 들으면 무난한 아동용 동화처럼 들리겠지만, 결말의 임팩트는 어른을 울린다. 자신이 누구인지 탐구할 겨를 없이 허겁지겁 세상의 속도대로 사는 일,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3『눈물바다』 , 글 / 그림 서현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날, 억울하고 우울하고 서러운 날. 아이에게도 그런 날이 있다. 아이가 눈물을 통해 감정을 해소하는 과정을 사랑스럽고 위트 있는 그림과 이야기 흐름으로 풀어냈다.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맞아, 나도 이런 마음이었어’ 하는 공감만큼 사람을 기운 나게 하는 감정이 또 있을까. 읽는 내내 ‘맞아 맞아’ 하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4『숲 속 재봉사와 털뭉치 괴물』 , 글 / 그림 최향랑
동물들에게 멋진 옷을 만들어주는 숲 속 재봉사에게 어느 날 냄새가 풀풀 나는 엉망진창 털뭉치 괴물이 찾아온다. “내게도 옷을 만들어 다오!” 마구 엉킨 털을 깎고 나니 그 안에는 아주 작은 강아지가 오들오들 떨고 있다. 괴물 쿵쿵이는 사실 버림받은 강아지였던 것이다. 겉으로 볼 땐 거칠고 분노에 차 있는 사람의 내면 안에도 여린 마음이 숨어 있는 법이라고 말하는 이 장면에서 ‘와!’ 하는 감탄이 터졌다. 사람에 대한 긍정이 털실처럼 포근하게 담겨 있다.

5『방긋 아기씨』 , 글 / 그림 윤지회
태어나 한 번도 웃지 않은 아기를 웃게 하기 위한 왕비님의 노력을 그려낸 책. 값비싼 옷을 짓고 맛있는 음식을 주고 우스꽝스러운 공연을 열어주었지만 아기는 웃지 않는다. 폭소가 터지는 마법을 선보인다는 마법사까지 동원한 어느 날, 마법사의 실수로 왕비에게 마법이 걸리고 깔깔 웃는 엄마 모습을 본 아기는 그제야 환하게 웃는다. 엄마가 웃지 않으면 아이도 웃지 않는다. 엄마들이 늘 저지르는 실수-자기는 하지 못하면서 아이에게는 하라고 가르치기-에 대한 ‘아차’ 싶은 깨달음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6『강아지와 염소 새끼』 , 글 권정생 / 그림 김병하
『강아지똥』의 권정생 작가가 열다섯 살 즈음에 쓴 시를 그림책으로 재탄생시켰다. 장난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강아지와 새침한 새끼 염소가 엎치락뒤치락 싸운다. 골이 잔뜩 난 염소가 죽자고 달려들던 때, 하늘에서 제트기가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간 떨어지게 놀란 뒤 무엇 때문에 화가 났었는지 잊어버린 둘은 사이 좋게 집으로 향한다. ‘골대가리 다 잊어버렸다’는 시구와 어우러진 마지막 마을 풍경에서는 ‘그래. 그렇게 살아지는 거지. 살아볼 만한 거야’ 하는 희망이 불쑥 차오른다. 이런 게 그림책의 힘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기획 레몬트리 민영, 사진 최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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