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치 미국 법무장관 ‘FIFA 마피아’ 와 전쟁 선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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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레타 린치 미국 법무장관이 27일(현지시간)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축구연맹(FIFA) 고위 관계자 등 14명을 뇌물 혐의 등으로 기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왼쪽은 제임스 코미 FBI 국장. [뉴욕 AP=뉴시스]

사냥꾼들이 호랑이를 잡으러 나섰다. 사냥꾼은 미국의 최정예 수사당국, 호랑이는 세계 축구계의 황제 제프 블래터(79)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다. 양쪽 모두 진검 승부다. 밀리는 쪽은 치명상을 입는다.

 27일(현지시간) FIFA의 부패 혐의에 대한 수사를 발표하는 뉴욕 맨해튼의 기자회견장. 로레타 린치 미 법무장관, 제임스 코미 미 연방수사국(FBI)국장이 등장했다. 그 옆에 금융 및 탈세 수사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미 국세청(IRS) 범죄수사국의 리처드 웨버 국장이 섰다. 세 사람의 동시 참석은 이례적이다. 최초의 흑인 여성 법무장관이 된 린치는 취임한지 한달 밖에 되지 않았다. 이번 수사 결과에 법무장관으로서 그의 리더십 순항 여부가 달려있다.

 상대방인 블래터는 대통령 못지 않은 권력을 누려온 국제적 거물이다. 1998년 FIFA회장에 취임한 이래 17년간 갖은 부패 스캔들에 시달리면서도 건재하고 있다. 흉내내기 힘든 업적도 있다. 저개발국에 축구를 보급했고 월드컵 흥행을 통해 FIFA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버금가게 만들었다.

 이번에 비리 혐의로 기소된 14명 중 9명은 미주 대륙의 축구행정가이고 5명은 이들에게 뇌물을 건네거나 전달을 약속한 혐의를 받는 스포츠 마케팅 업자들이다. 미 검찰은 FIFA 본부가 스위스에 있지만 이들이 뇌물 수수를 미국에서 논의했고 미국 은행을 통해 돈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미 세법이나 금융기관 규제법상 미 법정에 세우는 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공소장에 거론된 혐의는 충격적이다. 뇌물을 써서 월드컵을 유치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잭 워너 전 FIFA 부회장 등은 2010년 월드컵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부터 1000만 달러(약 110억원)를 수수했고, 결국 남아공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파리의 호텔방에서 1만 달러 지폐 묶음으로 꽉 찬 서류가방이 뇌물로 전달되기도 했다. 워너에게 남아공이 제시한 금액의 10분의 1인 100만 달러(약 11억원)를 제의한 모로코는 탈락했다.

 FIFA 회장 선거전도 돈으로 얼룩졌다. 2011년 선거에 출마한 한 인사는 축구계 관계자들을 모아주는 대가로 워너에게 36만여달러(약 4억원)를 온라인 송금했다. 워너는 그 해 5월 캐러비안축구연맹(CFU) 관계자들을 불러모았고, 행사가 끝난 뒤 참석자들에게 현금 4만 달러가 든 돈봉투를 돌렸다. 워너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부패는 FIFA 곳곳에 퍼져 있었다. 기소된 FIFA 간부들은 지난 20여년간 총 1억5000만 달러(약 1700억원)의 뇌물을 받고 독점 중계권과 마케팅권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과 2022년 카타르 월드컵도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 거액의 뇌물이 오갔다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린치 장관은 “기소된 이들이 1991년부터 20여년간 걸쳐 지위를 이용해 스포츠 마케팅 회사들에게 축구대회 광고권 등을 대가로 뇌물을 요구했다”며 “매년 대회 때마다 그렇게 했다”고 밝혔다.

 기소된 FIFA 간부들은 두 명의 현직 부회장(제프리 웹, 에우헤니오 피게레도)을 포함해 블래터의 측근들이다. 블래터를 정조준하고 있는 모양새다. 미 수사당국이 요란하게 공격 나팔을 부는 동안 블래터는 전열을 가다듬는 양상이다. FIFA 대변인은 블래터의 심경에 대해 “꽤 편안하다”고 대답했다. 블래터는 “축구계에는 부정부패가 존재할 여지가 없으며, 연루된 이들은 축구계에서 퇴출될 것”이라는 개인 성명을 냈다. 자신은 부패와 상관 없다는 과시인 셈이다.

 일단 미 수사당국은 블래터에 대한 수사 여부에 대해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다만 한 수사 관계자가 “블래터의 운명은 향후 수사에 달려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블래터에 대해 “기소는 되겠지만 다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그러나 담당 검사들은 “수사는 이제 막 시작됐다”고 장담하고 있다. 격렬한 승부가 예상된다.

 아디다스·코카콜라·비자카드·현대기아차·가스프롬 등 독점적 마케팅 권한을 지닌 FIFA 파트너들은 이번 사건과 거리를 두면서 기업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28일 보도했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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