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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 이젠 이벤트성 단기 봉사·기부 넘어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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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가별 기업시민지수는 그 나라의 국가경쟁력과 직결된다. 기업시민지수 상위권 국가들은 모두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하는 국가경쟁력 평가 최상위권에 포진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의 기업시민지수(21위)는 국가경쟁력(26위)과 비슷하다.

 서울대 김의영 한국정치연구소장은 “기업이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을 한다면 정부의 손이 닿지 않는 미시적인 사회 갈등까지 해결해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 효과를 낸다”며 “이는 사회 전체의 안정성을 높여 국가경쟁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경제 활동 측면에서만 강점을 보이는 한국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려면 기업의 사회적 활동이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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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기업시민지수가 부진했던 가장 큰 이유는 기업의 도덕성(37위)과 사회적 기업가의 활동(41위) 지표 값이 낮았기 때문이다. 조사대상 50개국 중 도덕성은 러시아(32위)와 스리랑카(33위), 인도(35위)보다 못했다.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미우라 히로키(三浦大樹) 교수는 “한국에선 기업과 오너가 동일시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재벌 총수의 비리가 기업 이미지와 직결된다”며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정경유착 등 불투명하고 비윤리적인 기업 경영이 도덕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몇 달간만 해도 기업 오너들의 부도덕한 행태는 연일 사회적 이슈가 됐다. 지난해 12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을 시작으로 지난 4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정경유착,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의 막말 등이다.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단순 봉사나 단기 이벤트에 집중된 것도 문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2014 사회공헌 백서’에 따르면 사회공헌 프로그램의 절반(49.4%)이 시작한 지 1~3년밖에 되지 않았다. 10년 이상 지속된 사업은 12.2%에 그쳤다. 사회복지협의회의 ‘2014 중견·중소기업 사회공헌 백서’에선 “기업 간 사회공헌 활동의 편차가 크고 일시적이며 단기적인 활동이 많다”고 지적했다. 미우라 교수는 “기업의 사회공헌이 많아지긴 했지만 이벤트성에 치중돼 시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 규모에 비해 사회적 기업가 수가 적은 것도 순위가 낮은 원인이다. 사회적 기업가는 단순한 이윤 추구의 활동을 넘어 공공의 갈등을 해소하고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개인을 뜻한다. 1981년부터 사회적 기업가를 양성해온 미국의 아쇼카(Ashoka)재단 등 3개 기관에 이름을 올린 한국인은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등 단 10명뿐이다. 파키스탄(57명), 베트남(39명), 필리핀(25명) 등보다 적었다.

 글로벌 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시민으로서의 리더십(17위)은 6개 지표 중 유일하게 20위 안에 들었다. 2005~2015년 WEF의 ‘글로벌 100대 기업’ 안에 든 기업 숫자를 누적 집계(중복 포함)했더니 한국의 13개 기업이 포함됐다. 김의영 소장은 “삼성과 포스코 등 글로벌 기업마저 없었다면 한국의 순위는 더욱 낮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이 이제는 단기적인 이벤트성 봉사 활동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제안이다. 이재훈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는 “어쩌다 돈을 내면서 생색내는 이벤트를 두고 사회공헌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며 “기업이 장기적 이슈에 관심을 갖고 해결 노력을 보이면 정부의 지원도 잇따르도록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입사원에게 ‘네 자녀 출산 서약서’를 받는 등 저출산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 한미글로벌 김종훈 회장은 “기업이 한 가지씩 사회 문제를 정해 그것만이라도 해결하겠다고 노력하면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특별취재팀=윤석만(팀장)·유성운·정종훈·임지수·백민경 기자, 김의영·미우라 히로키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교수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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