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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길·홍대보다 먼저 … 패션 최전선 된 이태원 뒷골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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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4일 오후 한남동 ‘옹느세자메’ 카페 앞 골목에 모여 있는 사람들. 옹느세자메(On Ne Sait Jamais)는 ‘아무도 모를 일’이란 뜻이다. [장혁진 기자]

‘뜨는 이태원’을 보려면 이태원역이 아닌 6호선 한강진역에서 내려야 한다. 출구를 나와 고급 레스토랑과 패션숍·카페들이 가득한 대로변을 10분 정도 걸었을까. 광고기획사 제일기획 건물 옆 샛길로 한 발짝 들어가니 독특한 풍경이 눈길을 끈다. 기묘한 복장의 젊은 예술가와 동네 토박이 노인들이 뒤섞인 작은 골목. 허름한 주택가 사이로 재기 발랄한 디자이너와 청년 창업가들의 아지트가 모여 있는 ‘하(下)자 골목’이다.

 이태원동 경계 바깥에 붙어 있는 이곳은 행정구역상으론 한남동이다. 원래 불리던 명칭은 하늘 위에서 본 모습 그대로 ‘T자 골목’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형태가 하(下)자 모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젊은 사장들이 낸 의류·소품·디저트 가게들이 길 주변부로 확장되면서다.

 가방 브랜드 유르트(YURT)의 디자이너 강윤주(34·여)씨도 새로 형성된 골목에 한 달 전 자리를 잡았다. 가방에 대해 묻자 강씨는 자신이 디자인한 빵(크로와상) 모양의 가방을 직접 메어 보였다. 강씨는 “똑딱 단추로 세 개의 면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인기가 높은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이 골목의 가게를 찾은 손님들은 물건을 만든 디자이너들의 설명을 직접 들으며 재미있어 한다. 디자이너들은 손님들 의견을 곧바로 제품에 반영하기도 한다. 고객과 디자이너 사이에 형성되는 윈윈(win-win) 관계가 이곳의 매력이다. 패션업계에선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기 전 시장의 반응을 살피는 데 여기만한 장소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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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거리에 둥지를 튼 디자이너 중엔 ‘핫플레이스 1번지’인 가로수길과 홍대 주변에서 이사온 이들이 적지 않다. 일본에서 디자인 공부를 마친 뒤 가로수길에서 11년 동안 모자 가게를 운영했던 유희정(40·여)씨도 그 중 한 명이다. 김씨는 “ 예전 분위기를 잃고 상업화된 거리 풍경이 싫어 이곳으로 왔다”며 “상대적으로 훨씬 싼 임대료도 장점”이라고 했다.

 최근엔 젊은 창업가들도 골목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3주 전 문을 연 디저트 카페 ‘옹느세자메(‘아무도 모를 일’이란 뜻의 프랑스어)’엔 간판도, 고정 테이블도 없다. 목욕탕 욕조를 가운데 두고 손님들이 빙 둘러앉도록 만들었다. 박기대(35) 대표는 “손님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이곳을 불러주기를 바란다”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을 가르는 테이블을 없애고 타인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골목의 터줏대감들은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는 젊은이들이 고맙기만 하다. 이 동네 ‘합덕수퍼’를 40년 동안 지켜온 장묘순(68) 할머니는 “겨울에 눈이 쌓이니까 청년들이 깨끗하게 거리를 치워주더라”며 “수퍼에 들를 때마다 꾸벅꾸벅 인사하는 젊은 친구들이 아들·딸 같아 정겹다”고 웃었다.

 하지만 사람이 몰리고 가게가 늘면서 부작용도 생겼다. 임대료가 올랐다. 짐을 싸는 원주민들이 나타났다. 10년 넘게 세탁소를 운영해온 윤유태(60) 씨는 “3~4년 전만 해도 가게 월세를 60만원 냈는데 올해부턴 100만원을 낸다” 고 했다. 외지인들이 골목에 불법주차를 하고 주택가 소음이 심해진 것도 문제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주민·상인·건물주 등이 참여하는 상생발전위원회에서 본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임대료 상한제 등 각종 대책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장혁진 기자, 김지은(인하대 건축학) 인턴기자 analo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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