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디아스포라] 한자 성경 120만 자, 4년간 붓으로 새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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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강은 밴쿠버 메이플리지에 자리한 집 작업실에서 새벽 5시에 글씨 쓰는 일로 하루를 연다.

그는 자신이 쓰는 붓글씨를 무심필(無心筆)이라 했다. 잘 쓰겠다는 욕심 없이 손 가는 뒤를 마음이 좇아 흰 종이와 검은 글씨가 놀게 뒷바라지한다는 뜻이다. 4년여에 걸쳐 5000여 시간을 들여 총 120만 자로 한자 성경 신약과 구약을 완서(完書)한 춘강(春江) 서정건(78)씨는 “다 쓰고 붓을 던진 나 자신도 놀랐다”고 회고했다. 잘 나가던 회사를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쉰여섯 장년기에 사남매를 이끌고 캐나다로 떠난 지 5년 만이었다. 막막했던 이민생활의 시름을 한 자 한 자 글씨로 눅이며 그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와 있는가’ 되새김질했다.

 “한국전력에서 일하며 나름 전문성을 인정받았고, 자립해 차린 대화기술단도 보람 있는 일터였지만 뭔가 인생의 핵심이 빠져있다는 안타까움이 낯선 땅으로 제 등을 떠밀었죠. 서예는 그 공허함을 메꿔준 나의 반려랄까요. 글씨는 손을 빌리지만 실제로는 마음으로 쓰는 것이니 책을 읽다가 좋은 글이 있으면 절로 즐거워 붓으로 써봅니다.”

 춘강의 성경 완서 얘기를 듣고 서예계의 원로 김응현(1927~2007) 선생이 “당신은 이제 명필이오. 글씨를 100만 자쯤 쓰면 글씨에 통달했다 봐야지”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춘강은 자신을 서예가가 아니라 ‘서가(書家)’라고 부른다. 그는 “자식들에게 좋은 글 한 구절이라도 써서 남길 수 있었으면 하는 각오였는데 아직 애들에게 글씨 한 폭을 써주지 못했다”며 “글씨에도 철이 들 때가 되었나보다”고 웃었다.

 춘강은 지난해 ‘부모은중경’을 일필로 쓴 데 이어 노자의 ‘도덕경’ 대필(大筆)에 들어간다. 내년쯤 귀국해 그간 쓴 글씨로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성경 완서 기록을 기네스북에 올리자는 지인들 성화를 말리는 중이다.

 “옛글에 이런 말이 있어요. 선한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먼저 기쁘고, 기이한 글을 보면 손으로 써보고 싶다. 지금까지 좋은 글을 골라서 내심 즐겁게 한 3000여 점 썼는데 얼마나 더 쓸 수 있을지.”

글·사진 밴쿠버(캐나다)=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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