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난의 대패" 역사는 일제가 조작|사학자 허선도씨 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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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임진왜난 (1592년4월∼1598년11월)에 대한 우리의 왜곡된 인식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지난 13∼14일 임진왜란을 집중조명한 단국대동양학연구소의 동양학학술회의에서 허선도교수(국민대·사진)는 임진왜란에 대한 몇가지 왜곡된 인식을 지적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 전쟁이 결코 우리측의 일방적 패퇴가 아니었다는 사보를 들었다.
임난하면 무조건 우리측만의 대패인양 인식돼있는데 적측이 승승장구한 것은 전체 80개월중 오직 초전2개월뿐이며 그후 정유재난때 4개월을 추가할수 있을 정도라는 것.
허교수는 임신년 4월 왜병이 쳐들어온 후 5월초에 서울이 함락되고, 6월중순 평양이 점렴당한것은 사실이나 평괴진주이후 그들의 진격을 우리가 능히 저지했다고 주장했다.
그후 반년간 전선을 교착시킨 다음 다음해 1월초 평양성을 일가에 탈환한후 곧바로 20일만에 서울 근교까지 적을 내몰았으며 4월하순에 수도를 완전수복했다. 그후4년간 휴전 (강화교섭)이 계속됐지만 이는 처음부터 우리측이 원치 않는 바로서 끝내 결렬, 정유년(1597년)에 적의 재침으로 1년남짓 전란이 지속됐었다.
허교수는 진상이 이런데도 임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생기게 된데는 19세기 중엽 이후 일제침략이 시작되면서 임난을 마치 우리측의 일방적 패배로 꾸미려고 한 식민사학의 영향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허교수는 또하나 오해의 요소로서 서애 유성룡의·『징비녹』을 들었다.
당시 영의정겸 도체채사로서 군국의 최고책임자였던 그가 「억리석은 신하로서 나라에 아무런 보답도 못했던 죄상을 드러내는 충정」 과 후일에대한 경계로서 난전미비와 초기의 패전에 중점을 둬 기술한 이 처서의 저작의도를 후인들이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일인들은 이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일찌기 에도(강호)막부시대부터 이책을 입수해 간행, 판을 거듭할 만큼 장려했다는 것이다.<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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