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21) 김제 조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김제조씨는 발지인 전배김제를 중심으로 남한에만 1만여가구 5만여명을 헤아린다.
약80여만평으로 추산되는 조씨가운데 16분의1을 차지하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데도 정작 김제조씨를 아는 사람은 많지않다.
발상지를 중심으로 전북일원에서만 대성으로 행세해 왔을뿐 고장을 벗어나선 이름조차 생소한 지방의 성씨로 지금껏 머물러왔다.
그러나 김제조씨는 실제에선 가문창립이래 7백50여년동안 꾸준하게 인재들을 낳아 민족사에 자취를 남기며 나름대로 전통을 세워온 실속있는 집안이다.
시조는 고려 고종때의 군인 조연벽.
김제읍용두동(현재의 옥산리)서 태어난 연벽은 무예가 뛰어나 장수의 재목으로 꼽혔다고 한다. 젊어서 어느날 꿈에 벽골제 수호신인 흰용의 부탁을 받고 벽골제를 빼앗으러 온 검은용을 활로 쏘아 쫓아준 은덕을 베풀었는데, 이때 검은용이 떨어뜨리고간 비늘을 조정에 진상, 크게 이름을 떨치고 벼슬길에 오르게됐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벽골제 전설로 유명>
연벽의 도움으로 벽골제못을 지키게된 흰용은 그날밤 꿈에 다시 나타나 『장군의 공으로 영원히 벽골제에서 삶을 누리게되었으니 그 보답으로 자손들을 대대로 융성케 하겠노라』 고 사은의 서약을 했다는 것이다.
군인으로 벼슬길에 나선 연벽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것은 1232년 (고종19년) 몽고의 살리타이가 침략했을 때. 대장군으로 임명된 그는 부장 김윤후와 함께 처인성(현경기도용인)에서 몽고군을 깨뜨리고 샅리타이를 사살, 무적몽고군에 패전의치욕을 안기면서 고려무사의 기개를 만천하에 떨쳤다.
이 공으로 연벽은 상장군이 되고 벽성군의 봉작을 받았다. 벽성은 그가 태어난 김제의 옛이름.
이를 인연으로 김제조씨가문이 창립된 것이다. 연벽은 죽은뒤 다시 좌의정에 추종됐다.
기·서·간 세아들을 두었는데 벽골제용의 다짐대로 모두가 현달,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맏아들 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장이 되어 잇단 몽고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대호군에 까지 올랐고 둘째 서는 문인이 되어 국자감진사에 뽑혔으며 세째 간은 어려서부터 시·문에 천재의 재질을 보여 나중 벼슬이 문하시중·우의정에까지 이르며『주자사서집주』를 간행, 성리학의 도입·보급에 큰 공헌을했다. 훗날 고향에 용암서원이 세워져 그를 배향했다.
조선조초기 김제조문의 인물중에는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임금자리에서 내쫓긴 단종을 영월까지 따라가 모시다가 단종이 죽게되자 함께 목숨을 끊은 절신 조대량이 있다. 그는 변조참판·평안감사까지 지냈으나 수양의 쿠데타가 나자 벼슬을 버리고 옛 임금을 좇아 두임금을 섬기지않는 절개를 지켰기에 오늘까지 영월 단종의 제사에는 그를 웃자리에 모시고 2백66명 순절신하들의 제사도 함께 지내오고있다.
그의 아우 우량은 세종때 흥해군수로 왜구를 격퇴하고 선정을 베풀어 그가 돌아가자 대제학 권근이 행장을 짓기도 했다.

<사화에 환멸, 낙향>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조의, 그의 아들로 호조판서에 오른 조숭지, 병조판서에 오른 숭지의 아들 원륜등이 또 두드러진다.원륜은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마천군의 봉작도 받았다.
처사 조윤침은 중종조 잇단사화·정쟁의 풍토에 환멸을 품어 벼슬길을 버리고 고향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지도에 일생을 바쳐 그 이름이 인근에 떨쳤고 조영립은 선조때 여진토벌전서 전사, 병조참판의 증직을 받고 충신으로 기록됐다. 같은 무렵 조용창은 지극한 효성으로 마을에 정려가 내려졌다.
인조조 3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조필달은 무략이 출중한데다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일생동안 72가지 벼슬을 지내며 뛰어 목민관으로 꼽혔고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효종이 돌아간뒤 북벌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완대장은 숙종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필달을 천거하기도 했다.
그가 쓰던 호남육군사령기와 군복한벌, 교지 10여점등이 김제군의 지방문화재로 지정돼있다.
조선조말 김제조문의 인물가운데 특기할 이름은 한몸의 곤욕을 무릅쓰고 고장이웃들의 고통을 임금에게 직접 진정, 해결하고만 조용환이다.

<신문고로 직접상소>
그는 순조때 해마다 가을이면 나라에 바치는 곡물을 먼거리까지 등짐으로 날라야하는 김제등 인근 여섯고을 주민들의 고통을 진정하기위해 친척1명과 함께 서울에왔다. 진정서를 임금에게 전하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수비군사들에게 붙들려 매를 맞고 진정서를 뺏기는등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끝내 물러서지않고 기회를 엿보다 신문고를 두드려 임금에게 직접 진정서를 전하고 그직후 김제의 동률강어구에 새로 해창이 신설돼 배로 간편하게 곡물을 갖다바칠수 있게했다는 것이다. 오랜숙원을 이룬 이웃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워 「위험한 형벌을 피하지않고 이웃의 사정을 위에 전 하였다. 가난한 이를 구하고 도와주니 군민은 다 덕을 입었도다. 동네사람은 그덕을 칭송하니 공물바치는 등짐길이 짧아짐이여, 밝은 덕을 뼈에 새겨 길이 잊지 않으리」 라고 찬양했다고 한다.
오늘날 시민문동의 한 작은 씨앗이라고 하겠다.
이괄난의 공신 조시준, 호조참의를 역임한 조덕술,효자 조길권·조항섭·조창현·조득양·조항진·조철귀등이 또한 조씨의 충효가풍을 세웠다.
근대의 조씨인물로는 김제중학교를 설립한 조재돈, 김제농업학교를 설립한 조재식등 육영사업가와 서예·묵화의 대가였던 벽하 조주승, 서예가 심농 조기석, 글씨와 4군자에 함께 능했던 조병헌등이 있다.
현대에 들어 김제조씨는 각계에서 조용한 전진을 하고있다.

<정·관계서 맹활약>
제헌의원 조한백씨는 4,5,7대의원과 체신장관을 지내며 신민당부총재를 역임하기도한 정계의 중진이었고 4·19당시 수도계엄사령관으로 시위학생·시민에 발포를 거부했던 조재미준장은 15사단장·수송감을 거쳐 예편, 현재는 매일관광회장으로 있다.
현재 관계에 35사단장을 지내고 준장으로 예편한뒤 전북지사를 거쳐 국가보훈처 (전 원호처)처장으로 있는 조철권씨와 정계에 민정당 김제-부안 지역구의원 조상래의원, 학계에 조선웅 전북대 상대학장등이 활약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