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 세상을 말하다] 懲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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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落月微微下遠村)/갈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寒鴉飛盡秋江碧)/누각에 머무는 객 잠 이루지 못하는데(樓中宿客不成眠)/온 밤 서릿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네(一夜霜風聞落木)/두 해 동안 전란 속에 떠다니느라(二年飄泊干戈際)/온갖 계책 오래하여 머리만 희었네(萬計悠悠頭雪白)/서러운 두어 줄기 눈물 끝없이 흘리며(衰淚無端數行下)/아스라한 난간 기대고 북극만 바라보네(起向危欄瞻北極)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임진란 다음해인 1593년 지은 ‘청풍의 한벽루에 묵으면서(宿淸風寒碧樓)’란 시다. 서애는 “내가 그것을 징계해 훗날의 어려움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시경(詩經)』 ‘소비(小毖)’ 구절을 인용해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이전의 잘못을 꾸짖어 다시 범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뜻으로 중국서는 ‘징전비후(懲前毖後)’라 쓴 용례가 명(明) 재상 장거정(張居正), 마오쩌둥(毛澤東) 등의 글에 보인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징비록』이 인기다. 『징비록』은 보한재(保閒齋)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유언으로 시작한다. 죽음을 앞둔 보한재에게 성종(成宗)이 “경은 무슨 남길 말이 없소”라 묻자 그는 “아무쪼록 앞으로 일본과 실화(失和)하지 마시옵소서”라 답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보한재·서애의 바람과 달리 전통시대 한·중·일 3국은 정상적인 교류가 막혀 화친은 난망(難望)했다(이성규, ‘전근대 동아시아 교류의 열림(開)과 막힘(塞)’, 2011). 중국이 모든 대외 관계를 화이(華夷)사상에 기초한 책봉-조공 형식만 고집해서다. 중국의 법률제도를 수용한 동아시아 국가도 다를 바 없었다. 너도나도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이웃 나라에 사대(事大)의 예(禮)를 요구했다. 조선이 막부(幕府)에 그러했고 막부 역시 매한가지였다. 각국 지도층은 이웃에 대한 정확한 이해보다 오해와 편견, 상호 경시(輕視)에 익숙했다. 현재 한·중·일의 불화(不和)도 역사의 타성(惰性)에서 벗어나지 못함이 큰 이유다. 징비는 우리 안의 중화사상을 극복함에서 시작해야할 터다.

신경진 국제부문·중국연구소 기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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