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해라, 저거 내라 … 속터지는 온라인 계좌 개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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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A씨는 거래가 없던 은행의 계좌를 새로 만들기로 했다. 지점을 직접 찾는 대신 A씨가 택한 건 온라인 계좌 개설이다. 가입신청서도 은행 홈페이지에서 간편하게 작성했다. 문제는 실명 확인이다. 은행에 갔다면 창구직원에 신분증을 내밀면 되지만 온라인으로 처리하려면 여러 차례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우선 휴대폰으로 신분증 사진을 찍어 은행으로 전송한다. 이 정보를 확인한 은행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와 다른 은행 계좌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답하자 그 계좌에서 새로 만들 계좌로 소액을 보내보라는 안내가 이어진다. 인터넷뱅킹으로 이체를 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은행측은 다시 휴대전화를 통해 한차례 더 본인 인증을 하도록 주문한다.

 올 12월 이후 펼쳐질 가상 상황이다. 금융당국은 지난 18일 은행 계좌를 열 때 온라인으로 실명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1993년 금융실명제법 실시 때 내놓은 유권해석을 수정할 예정이다. 반드시 은행 창구 직원과 마주보고 실명을 확인을 해야한다는 ‘대면 확인’ 원칙은 22년만에 사라진다. 인터넷전문은행 등 핀테크(Fin-tech)산업 육성을 위한 ‘걸림돌’을 치우는 절차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공개된 비(非)대면 실명확인 방안은 핀테크의 가장 큰 장점인 ‘간편성’ 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다단계 확인 절차가 의무화한다. 간편성을 높일 수록 보안은 취약해지는 ‘핀테크의 딜레마’ 탓이다. 실명 확인을 느슨하게 할 경우 자칫 금융사고가 빈발하고, ‘대포통장’이 급증할 수 있다는 게 금융당국의 우려다.

 이에 따라 온라인으로 계좌를 열 때는 신분증 사본을 보내는 것을 기본으로 ▶금융회사 직원과 영상통화▶현금카드·보안카드 전달 때 신분증 확인▶기존 계좌를 통한 소액이체 중 최소 한가지 이상은 의무적으로 더 해야한다. 금융위는 여기에 금융회사가 자체적으로 추가 확인 수단을 적용하도록 권고할 계획이다. 휴대전화 본인 인증, 공인인증서 제출 등이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대부분의 금융사들이 최소 3단계 이상의 확인 절차를 도입하게 되는 셈이다.

 소비자들로선 지점을 직접 찾아가되 신분증만 내밀면 되는 방식을 택할 것인지, 지점을 방문하는 수고를 더는 대신 여러 단계의 확인 절차를 거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금융위 관계자는 “어떤 방식을 편리하게 느낄지는 고객에 따라 다를 것”이라면서도 “대부분의 고객들은 계속 은행 창구를 찾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은행에 따라선 당국의 권고보다 오히려 절차를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드는 곳도 나올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핀테크가 활성화할수록 기존 은행 영업점의 수익은 쪼그라드는 또다른 차원의 딜레마 탓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은 지점에 들르는 고객이 많아야 펀드, 보험 같은 금융 상품을 팔 기회가 생긴다”면서 “온라인 절차가 간편해질수록 방문 고객이 줄어드는데 은행이 적극적일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결국 은행권 핀테크 활성화의 주역은 인터넷전문은행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다. 하지만 또다른 걸림돌인 ‘은산분리’가 난제다. 금융당국은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제한한 규정을 인터넷전문은행에는 적용하지 않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은산분리 규정을 그대로 둘 경우 사실상 기존 은행과 증권사 등 금융회사들만 진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산업자본에 길을 터주되 대기업(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은 계속 막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다만 산업 활성화를 위해 통신 대기업은 진입을 허용할지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위는 다음달 중 정부안을 확정, 연내 인터넷전문은행 도입을 추진할 방침이다.

 하지만 정부의 유권해석을 바꾸면 되는 비대면 실명확인과 달리 은산분리 완화는 국회에서 은행법을 개정해야하는 만만찮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업계에서 연내 도입 전망을 어둡게 보는 이유다. 서병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민감한 사안이라 국회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은데다 법이 개정되더라도 업체들이 사업을 기획하고 정부 승인을 받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면서 “연내 실현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조민근·염지현 기자 jm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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