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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이 「신학」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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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7일 로마 교황청의 남미 해방 신학자 「레오나르도·보프」 신부에 대한 사문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보프」 신부는 이 사문회를 통해 교황청 신앙교리성생이 문제시하는 해방신학의 이론들을 해명했고 뒤이어 세계의 유수한 매스컴들이 그의 회견 기사를 보도했다.
교황청의 해방신학 사문회가 널리 관심을 모은 이유는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일각의 「해방운동」이 단순한 가톨릭 교회 내부의 교리 문제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기독교의 사회주의 수용과 관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신학 문제는 남미대륙은 물론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과도 다소의 관계를 갖는 중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도 남미 국가는 아니지만 상당수의 기독교 신자를 가진 입장에서 이 같은 해방신학 문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우기 우리의 현실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는 체제 문제를 강 건너 불처럼 쳐다볼 수 없는 처지이고 남미 지역 밖에서는 해방신학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고 있는 나라의 하나라는 점에서 교황청의「보프」 신부 사문회 보도를 읽는 심정이 착잡했다.
「보프」 신부 사문의 초점은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를 수용하고 있다는 교황청의 견해였다.
신앙교리성생 장관 「라칭거」 추기경은 『해방신학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기독교적인 책임감은 받아 들일만 하지만 그들이 어떤 면에서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점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거듭 밝혀 왔고 이번 사문회에서도 다시 확인했다.
「보프」 신부 자신은 이에 대해 『교황청이 해방신학을 오해하고 있다』는 입장과 함께 해방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보도됐다.
해방신학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 방법은 오래 전부터 지적돼 왔고 찬반의 두 견해 모두가 상당한 타당성을 가진 것들이기 때문에 이번 사건은 더욱 주목됐다.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라칭거」 추기경의 비판에 동의하는 사람들 수가 절대 다수다.개신교에서도 급진 복음주의자들이 「변두리 사람들」에 대한 해방신학의 관심에는 동조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요소는 반대한다.
대부분의 해방신학자들은 자신들을 마르크스주의자로 보지 않으며 「마르크스」의 형이상학이나 도그머, 유물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못박는다.
사실상 「마르크슨 의 형이상학을 받아들이면 가톨릭 신학은 성립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적이라는 의심을 받는 이유는 신학의 발생 동기·신학 방법 사회문제 해결 방법 등이 지나치게 마르크스주의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신학의 출발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남미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해방신학자들은 모든 신학은 구체적 역사적 상황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통 신학의 출발점이 성경이나 형이상학적 원리라는 비판을 전제한 이 같은 주장은 어디까지나 착각이다.
전통신학 역시 구체적 역사적 상황에서 시작됐다.
전통신학에 대한 해방신학의 비판은 「마르크슨 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같은 형식을 취한다. 해방신학은 「변두리 사람들」속에 꿈틀거리는 의식을 개발, 의식화시키고 기독교적 해석을 가미해 「해방」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강력한「실천」을 내세운다.
해방신학이 출발점으로 이용하는 남미의 상장은 가난과 억압의 상황이다.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이며 그런 형태로 근 4세기동안 지내 왔으나 극심한 빈부의 차 때문에 가난한 사람의 생활은 실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매우 비참하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데 해방신학자들은 「도스·산토스」 등의 「종속 이동」에 따른다. 그들은 남미가 가난하고 빈부의 차가 심한 것은 남미의 경제가 미국·일본 등 경제적 제국주의 국가들에 종속돼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 종속이 가능한 것은 남미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해방 신학자들은 이 종속관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남미의 경제 체제를 사회주의 체제로 바꾸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사회주의를 위한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상황 설명과 문제 해결의 모색은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분석방법을 도입한 것이다.
물론 남미의 모는 해방신학자들의 견해가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구티에레스」 「보니노」 「아스만」 등은 비교적 급진적이며 특히 「아스만」은 좀 지나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르헨티나의 「게라」, 우루과이의 「세군도」·「미란다」·「소브리노」· 「보프」 등은 훨씬 온건한 사람들이다.
해방신학을 어떤 남미 신학자들이 평하는 것처럼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것은 분명히 지나치다. 그들이 「마르크스」의 사회분석이론을 받아 들이고 사회주의를 남미의 이상적인 체제로 발아들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 인간관에 기초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출발점과 목적은 기독교적 사랑과 사회정의의 실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티칸의 입장도 쉽사리 무시할 수 없다. 비록 「마르크스」 철학적 전제들과 동의하지는 않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사회분석방법으로 채택한다는 것은 상당한 실질적 결과를 동반한다. 계급투쟁을 해방의 방법으로 사용한다든가, 폭력도 어느 정도 용인한다든가 기독교적 입장에서 수용할 수 없는 점들이 없지 않다.
남미의 상황에서 보면 해방신학의 시도는 동정할 만하고 남미 기독교의 자기 반성으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지만 해방신학이 과연 신학이냐하는 일부 신부들의 질문에 동감을 표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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