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챌린저 & 체인저] 무진주에서 무한도전 … 43명이 250억 팔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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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 12일 광주광역시 무진서비스 공장에서 최은모 대표가 배터리 셀을 만드는 용접기계(‘스트랩 테스팅 머신’)를 직접 시험 가동해 보이고 있다. 최 대표는 늘 새로운 연구와 도전에 촉각을 세운다. 올해는 오토바이 배터리 라인업을 새롭게 갖출 계획이다. [프리랜서 오종찬]

1980년대는 정치적으론 암울해도 경제적으론 신바람나는 시대였다. 취직도 승진도 잘됐다. ‘3저(원화가치·금리·유가 약세) 현상’에 기업마다 매출이 쑥쑥 늘었고 봉급도 큰 폭으로 늘었다.

 그런 ‘좋은 시절’이었던 1988년 최은모(56) 대표는 무진서비스를 세웠다. 산업용·자동차용 배터리 설비를 설계·생산하는 회사다. 광주의 실업명문 숭신공고(현 숭의고)를 나와 화천기공에서 10년 넘게 경험을 쌓은 최 대표는 광주의 옛 지명인 무진주(武珍州)에 ‘무한 서비스’ 정신을 합쳐 사명을 지었다. 로고에도 무한대를 의미하는 수학기호(∞)를 썼다. 그리고 27년째. 광주 광산구 평동산업단지에 자리잡은 회사는 이 분야 세계 1위를 넘본다. 100년이 훌쩍 넘은 영국의 TBS와 앞서거니 뒷서거니한다. 국내 ‘빅4’배터리 제조사는 물론 세계 톱10 제조사가 모두 고객이다. 지난해 매출은 250억원. 43명의 직원이 인당 6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셈인데 아무리 제조업이 위기다, 경기가 어렵다 해도 이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제조업체로선 이례적으로 지난해 영업이익률이 17%에 이른다.

설비 국산화에 턴키방식 수출 … 업계 혁신

 지방소재 중소기업이 겪는 어려움 4가지. ‘규모의 어려움, 무명의 어려움, 국제화의 어려움, 지방소재의 어려움’이 그것이다. 그러나 무진서비스는 이 어려움을 품질과 서비스로 극복해냈다.

 창업 초기 작은 기계설비를 만들던 최 대표에게 89년 우연한 기회가 왔다. 광주의 한 배터리 제조사가 설비를 국산화한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갔는데 “이거다” 싶었던 것. 당시 배터리 제조설비는 100% 수입에 의존했는데 그 대단하다는 영국, 미국 제품이 별 게 없었던 것이다. 최 대표는 정밀도가 높은 공작기계를 만들었다. 그런데 수입 배터리제조 설비는 이보다 정밀도가 떨어지는 산업용기계였다.

매년 전직원·가족 해외연수 … 눈높이 수업

 최 대표는 당장 수입산 산업기계의 ‘국산 공작기계화’에 나섰다. 제조설비가 정밀해지자 배터리 품질도 올라갔다. 고객사 반응이 좋았던 건 당연하다. 두번째 혁신은 글로벌 업계 최초로 ‘턴키방식 수출’을 도입한 점이다. 말 그대로 키 하나만 돌리면 운전 가동할 수 있는 일괄수주 방식이다. 일례로 미국 제조사가 설비를 사가면 무진서비스는 배터리 설계부터 제작·시운전·설치·생산·교육까지 모두 책임진다. 또 회사 직원 2~3명이 팀을 이뤄 보름에서 한 달가량 머물며 철저한 서비스를 책임진다.

 글로벌 업계에 ‘무진은 모든 문제를 24시간 안에 해결한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다. 최 대표는 “서양 회사와 달리 한국적 마인드로 ‘빨리빨리’ 해결해 준 게 효과가 컸다”며 “품질은 기본이고 서비스가 차별화 포인트”라고 말했다.

 무진은 매출의 80%를 해외에서 거둬들인다. 수출기업으로서 가장 큰 장애물은 언어나 인지도가 아닌 ‘눈높이의 한계’였다. 세련된 디자인, 완벽에 가까운 정밀함을 추구하고 싶지만 “뭘 어떻게 할 지 모르겠다”는 거다. 한 마디로 우물안 개구리라는 얘기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 대표는 매년 전 직원과 그 가족을 해외로 연수 보낸다. 워크숍 참석이나 보고서 작성 등 어떤 의무도 없다. 해외여행과 다를바 없지 않나.그러나 최 대표는 “그 나라의 유적이나 생활 문화를 보고 ‘정말 대단하다’, ‘만만치 않은 나라다’라고 느끼는 것 자체가 큰 배움”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중국 관광객만 본 사람은 중국에 나갈 기계를 만들 때 대충 만들 수도 있어요. 평소에 가진 생각으로 만들게 돼 있어요. 하지만 직접 중국에 가서 보고 거래처 사람들 불만도 들어보고 하면 절대 그렇게 못해요.”

 매주 화요일을 ‘학습의 날’로 정해 기술·경영분야 전문가들에게 컨설팅 교육을 받고 있는 것도 무한서비스의 독특한 학습법이다.

 회사는 연구개발(R&D)에 매년 매출의 20% 정도를 쓴다. 트렌드 선도와 기술 혁신없이는 우수한 인력을 잡아둘 수도 없고 업계에서 버틸 수가 없다. 최근 고교 강연에서 최 대표는 “살아남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세계 최고, 세계 1위 이런 말 쓰지 마세요. 어떤 분야든 나보다 훌륭하고 실력있는 상대가 꼭 있어요. 그 경쟁에서 지면 사라지는 겁니다. 하루하루 끝없이 노력한다는 것 외에는 어떤 수식어도 의미가 없어요.”

외환위기 때도 감원 안해 숙련 기술자 지켜

 최 대표는 27년간 기업이 망할뻔 한 고비를 4번 넘겼다. 외환위기 당시 경영층에선 “몇 개월이라도 직원을 좀 줄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최 대표는 “사업은 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좀 폼나게 망하고 싶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설계자 하나 키우려면 10년을 가르쳐야 하는데 어려울 때 직원을 자르는 회사가 제일 미련하다”는 믿음이었다.

 판단은 옳았다. 위기가 지나자 일이 다시 들어왔지만 직원을 해고한 경쟁사들은 업무를 처리할 설계사들이 없었다. 결국 일감은 무진서비스로 몰렸고 회사는 돈을 벌었다. 위기에 내실을 다진 것도 주효했다. 금융위기 당시 최 대표는 영업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루는 괴로운 마음에 선배와 맥주를 마시는데 “지금은 혼자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으니 그냥 썰물에 몸을 맡겨라”는 조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 대표는 잠시 영업을 멈추고 설비 하나하나를 업그레이드 하고 라인업을 싹 바꿨다. 축 쳐진 직원들에게도 “정신없이 수주가 들어올 때는 언제 이런 걸 공부하고 바꾸겠어. 우리 진짜 운이 좋은거야”라며 분위기를 돋웠다.

 최 대표는 “그런 작업이 없었다면 지금쯤 뒤쳐져 있을 것”이라며 “2008년까지만 해도 여럿 있던 경쟁자가 어느 날 돌아보니 별로 없더라”라고 했다.

 2000년대 초엔 두 차례에 걸쳐 고객사에게 퇴짜를 맞기도 했다.

 최 대표는 “기술력이 부족해 국내 제조사가 원하는 스펙에 못 미쳤는데 이 업계에선 ‘못하겠다’고 포기하는 순간 퇴출”이라며 “1년 동안 다른 걸 모두 중단하고 고객이 좋다고 할 때까지 품질 개선에 매달렸다”고 회상했다. R&D에 대거 투자하고 실력 있는 인력을 찾아 보강한 것도 이런 고비가 계기가 됐다.

“사훈, 세계 1위 목표 없다 … 현실에 충실”

 배터리 산업은 계속갈까. 최 대표는 “요즘 개발 중인 드론도 배터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며 “배터리는 변하지 않는 사업 중 하나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그가 주목하는 건 연료전지다. 전기차는 아직 실용화되기 어려운 과도기라고 본다. 최 대표는 “세계 웬만한 회사가 모두 연료전지에 매달려 있는데 누가 살아남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결국 자본력과 기술력이 관건인데 우리가 해볼 만한 분야를 열심히 찾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30년을 위해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는 얘기다. 그렇지만 무진서비스엔 사훈이나 목표가 없다. 최 대표는 “우리는 엔지니어링 회사고 생각이 자유로워야 살아남는다”며 “슬로건이든 사규든 틀을 안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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