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바닷속에 잠긴 「항로이탈 원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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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KAL기 피격사건은 영원히 미제로 남을 것인가.
항로이탈원인을 둘러싼 갖가지 추측과 가정·설들.
그러나 그 어느것도 사할린 찬바다에 저버린 2백69위의 고혼을 달래줄 해답이 되기엔 미흡할 뿐이다.
유일하게 사고원인을 밝혀줄 것으로 기대했던 블랙박스의 회수도 실패로 끝난지 이미 오래.
9월1일 KAL기 피격사건 1주기를 맞아 사고원인의 가능성들을 정리해본다.

<첩보설>
가장 자주 거론됐고 논란의 대상이 되고있는 첩보설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조사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할 어떠한 증거도 찾을수 없다는 결론으로 배제됐다.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있다면 소련의 방위체제를 시험하기위해 고의로 2백69명의 생명을 사지에 몰고 갔다는 논리는 한낱 억지에 지나지않는다는 것이다.
ICAO는 제25차 총회에서 민간항공기에 대한 무력사용금지를 시카고협약개정안에 채택,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려는 소련의 저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계기고장>
피격 KAL기가 비행한 북태평양항로 (NOPAC ROUTE) R-20은 INS등 운항컴퓨터의 의존도가 절대적인 항로.
앵커리지∼동경간에는 민간항공기를 위한 라디오 스테이션이 없고 라디오교신 상대도 믿을수 없는 지역이어서 운항계기의 정상작동여부는 가장 중요한 의문일수밖에 없다.
지난5년간 미항공우주국(NASA)이 확인한 INS고장은 21건.
항공전문가들은 정확 무비한 INS를 장착한 항공기의 항로이탈은 있을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반면에 KAL007편이 22번째의 INS 고장이라는 불운을 지니지 않았다는 반증도 없다.
INS는 입력된 자료의항로에서 0·1마일만 벗어나면 계기판에 숫자가 나타나도록 돼있다지만 피격KAL기는 첫위치 보고지점인 베델(앵커리지)에서 이미 정상항로에서 12마일을 이탈했던것같다.

<인적요인>
항공사고는 둘이상의 실수나 우연이 겹칠때 발생한다.
이때 실수는 우연에 우선하며 통상 조종사나 관제사의 과실도 전체 항공사고원인의85%.
ICAO조사는 조종사가 앵커리지 이륙후 비행방향을 나침반 침도 2백46도로 맞춰놓은 뒤 INS유도방식으로 전환하는것을 잊었거나 앵커리지 출발지점의 경도를 실제보다 10도 동쪽으로 오입했다면 피격행적과 일치한다고 가정했다.
어느쪽이든 조종사 과실을 전제로한 두 가정은 피격장소와의 거리에 다소 차이가 있다고 KAL측에서는 그 가능성을 부인하고있다.
그러나 국제민간항공기록에는 실제 이같은 조종사의 실수가 여러차례 기록돼 있고 KAL조종사들 중에서도 「눈의 착각」이나 「통상적인 확인작업의 생략」으로 유사한 경험이 있다고 인정한다.
즉 9개의 좌표를 INS에 입력하는 작업은 버튼식전화기를 걸듯 1백17번의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확인작업이 생략됐다면 『정상적으로 가동하겠거니』하는 과신속에 항로이탈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피격KAL기의 사고원인이INS고장과 조종사의과실이 병행된것인지 또는 그 어느 한쪽인지, 아니면 일부외신보도처럼 소련의 전파유인과 같이 상식을 초월한 것이든 간에 진실은 블랙박스 속에 담겨 사할린 심해에 잠들어 있다. <엄주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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