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행복어사전] 한없이 부끄럽던 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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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호 34면

“선배, 저예요.”

휴대전화로 낯선 번호의 전화가 왔다. 업무상 처음 걸려오는 전화가 많기 때문에 무조건 받는 편이다. 저쪽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가 끊으려고 하자 그제서야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영이.”

미영은 잘 모르는 후배다. 10년 전인가 대학 후배라면서 사무실로 한 여성이 찾아왔다. 친한 동아리 후배의 이름을 대면서 그가 소개시켜줬다고. 자신도 동아리 후배라고.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선배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고. 학교 졸업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지금은 보험 일을 한다고. 일찍 결혼한 편이라 벌써 초등학교 다니는 딸 아이가 하나 있다고. 선배도 결혼을 일찍 하지 않았느냐고. 혹시 보험은 들어둔 게 있느냐고.

당시 나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면서 천식 치료를 받던 중이라 보험 가입이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도 미영은 나를 찾아왔다. 자기 일하는 사무실이 내가 있는 회사와 가깝다며. 커피만 마시고 갈 때도 있었고 점심을 함께할 때도 있었다. 미영은 나를 걱정했다. 천식이 있는데 보험가입은 되지 않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고. 나는 그런 미영이 고마웠다. 그래서 친절하게 대했던 것 같다. 미영이 여자 후배이고 예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자주 찾아오던 미영은 언젠가부터 뜸해지더니 결국 연락이 끊겼다. 가끔 친한 후배로부터 힘들게 산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그리고 대략 10년이 흐른 셈이다.

“선배 잘 지내죠?”

나는 그럭저럭 지낸다고, 미안한데 곧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며 용건을 물었다. 미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선배 많이 바쁘구나. 죄송해요. 특별한 용건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선배가 생각나서요. 바쁘실 텐데 다음에 전화할 게요. 참, 선배 천식은 좀 어때요?”

나는 이젠 적응이 되어 괜찮다고, 고맙다고, 나중에 또 통화하자고,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꼭 연락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미영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것은 이틀 후였다. 아내와 함께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기 시작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는 후회했다. 저번 통화할 때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특히 ‘언제든’이나 ‘꼭’이란 부사는 빼야 옳았다. 스티븐 킹이 그랬던가.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로 뒤덮여 있을 거라고. 어쩌자고 나는 그런 무책임한 말을 했을까. 아마 간단히 용건만 묻고 바쁘게 전화를 끊는 미안함과 전화를 빨리 끊게 된 안도감이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집이었고 밤 10시 20분이었다. 아무리 잘 모르는 후배라고 해도 아내는 믿지 않을 것이다. 전화를 안 받으면 아내가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결국 나는 받았다.

“선배, 저예요.”“응. 그래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내 목소리의 손이 상대를 힘껏 밀어낸다.

“미안해요. 늦은 시간에.”

아내는 거실 바닥에 앉아 걷어놓은 빨래를 차곡차곡 개고 있다. 나는 빨리 전화를 끊고 싶다.

“급한 일인가 보다. 이런 시간에 전화를 한 걸 보면.”“선배 집 주소 좀 알려줘요.”

아내는 아까부터 같은 빨래를 계속 다시 개고 있다.

“주소는 왜?”“제가 선물을 하나 보내고 싶어서요. 선배한테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나는 선물 같은 거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늦은 시각이니 다음에 통화하면 좋겠는데.
“선배는 참 따뜻한 사람이에요. 난 다 알 수 있어요.”

나는 차가운 사람이다. 몸이 얼음처럼 차 5월에도 내복을 입고 잔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미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바보 같은 제 이야기를 항상 들어주니까요. 선배, 저한테 딸이 하나 있었잖아요. 그 아이가 1년 전에 죽었어요. 고등학생이었거든요. 참 예쁜 아이였는데. 답답해서 누구한테든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전화라도 걸고 싶은데. 다들 바쁘니까 제 전화를 못 받는 거에요. 받아도 통화를 못하고요. 선배 생각이 났어요. 저번에 선배가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꼭 전화하라고 했잖아요. 저는 그 말이 진짜 고마웠어요.”

나는 내가 몹시 부끄러웠다.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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