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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기획] 시인 유용주의 송년 에세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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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올해 출간된 도서 가운데 단박에 눈길을 끈 제목의 책이라면, '쏘주 한잔 합시다'(큰나)일 것이다. '소주'가 아니라'쏘주'라고 했기에, 그리고 '쏘주'한 잔 권한 이가 세상 경험을 꾹꾹 눌러쓴 시인 유용주(45)였기에, 이 산문집은 제목의 후광을 뛰어넘어 하반기 베스트셀러의 판도를 뒤바꾸기에 이르렀다. 충남 서산에 사는 시인이 송년 에세이 한 편을 보내왔다. 폭설에 묻힌 마을에서 전하는 에세이는 올해의 반성문이자 새해의 다짐으로 읽힌다.

폭설이다. 세상에 공짜로 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일찍이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보름 전 토요일 오후, 소나무 숲 사이로 소리없이 첫눈이 내릴 때 바다를 끼고 있는 서해안의 작은 도시 학생들은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아이들의 볼은 늦가을 햇볕에 무르익은 사과 같이 붉게 빛났다. 대낮에도 불을 환히 켜고 기말고사를 치르는 내내 눈은 내렸다가 녹고 녹았다가 다시 쌓여 두텁게 구들장을 만들었다.

최근 충남 서산에서 잠시 올라와 서울의 길거리에선 시인 유용주씨. [안성식 기자]

저 구들장 밑으로 수많은 생명이 꿈을 꾸고 물이 오르고 움을 틔워 축복인 듯 봄은 오리라, 다가오는 성탄과 새해는 더없이 따뜻하리라 예상했던 어른들은 일주일이 넘게 눈이 내리자, 깨진 연탄처럼 어두워졌다. 얼어붙은 양어장에 허옇게 죽어 떠오른 물고기들 앞에서, 무너진 집과 축사와 비닐하우스 앞에서, 끊긴 도로 앞에서, 그 뒤로 산더미처럼 몰려오는 세계화의 높은 파도 앞에서,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고향을 보았기 때문이다.

소주 대신 농약을 털어 넣는가 하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절명시(絶命詩)를 써 놓고 쓰러진 아버지,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한 겨울잠 자기가, 다 함께 누리지는 못해도 검소한 차림으로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이렇게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만 해가 바뀌고 진정, 따스한 봄이 온단 말인가?

저 분들 앞에서 글을 쓰는 행위는 사치다, 중얼거리면서 나는 천천히 소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돌이켜보면 소주잔에도 많은 세월이 흘렀다. 소주처럼 맑고 무서운 문학을 하고 싶었다. 값은 싸지만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미끄러지면서 넘어지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신문 연재와 방송국 프로그램에 책이 선정된 일은 내게 커다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기쁜 일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슬픈 일은 오래 남는다. 그 사이에 그리워하면서 존경했던 몇몇 분들을 잃었다. 말 때문에 생긴 상처가 칼로 찌르는 아픔보다 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순전히 공부가 짧고 덕이 모자란 내 탓이다. 다시는 이 분들과 옛날같이 좋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식도가 타들어간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이제는 거품도 사라졌고 맨 처음 그대로, 아니 훨씬 늙고 추한 몰골로 오도카니 남았다. 그러나 안주 먹기 전에 간신히 한 말씀 드린다면, 좋은 문학은 꼭 그만큼의 삶에서 우러나온다는 것.

처음이란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한없이 가난하기만 했던, 지금 내 나이에 가장 활발하게 작품을 쓰신 박상륭.이문구.찰스 부코우스키.마루야마 겐지 같은 스승들이 보인다. 나는 이 분들의 작품을 신주단지 아끼듯 책상 위에 모셔 놓고 아침저녁으로 공양 지어 예불을 올렸으나 밥보다 싼 소주 한 잔 없었다. 참 지독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선배들은 다 이런 식이다. 물과 얼음을 타서 마셔도 기가 질리게 매웠다. 한 소식 얻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폭설보다 두터운 업장을 짊어지고 걸을 수밖에. 걷다 보면 저 눈길을 따라 아주 떠난 사람도 있었고(박남준의 시 '눈길'), 비탈에 묻힌 사람도 있었고(윤중호의 시 '영목에서'),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이 분들 앞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참 한심한 일이구나, 웅얼거리면서 다시 소주 한 잔을 따라 단숨에 털어 마신다. 약간 용기가 생긴다. 바닥을 치는 게 소주잔이다. 이제 더 이상 내리막길은 없다. 소주 한 잔은 메이저리그에 대항해 '맞짱'뜰 수 있는 마이너리그의 유일한 무기이자, 중심의 권위를 해체하려는 변방의 치열한 몸부림이다. 그래서 소주 한 병이 가장 무섭다. 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장 바닥에서, 지하 수천 미터 막장에서, 수심 오천 미터 인도양 한복판에서, 중동 사막에서, 포장마차에서, 최전방 철책선에서, 눈 내리는 막노동판에서, 치운('추운'의 옛말) 겨울바다 고기잡이 배 위에서, 몸 하나가 방이자 이불인 서울역 지하도 노숙자들과 함께, 폭설에 무너지고 찢긴 고향땅 어르신들과 함께 한 잔의 소주로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보는 것이다. 소주와 눈물과 바다와 하늘은 같은 색깔이다. 피를 나눈 형제들이다.

힘있는 자들은 결국 사라지겠지만 힘없는 우리들은, 없음이 유일한 재산인 우리들은, 그 없음으로 인해 끝까지 살아남아 이 땅을 증명할 것이다. 현기영 선생님 말씀을 빌리자면 눈물은 아래로 떨어지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소주잔은 위로 올라간다. 눈물 섞인 소주잔은 눈 녹은 물이 섞인 삶의 탕약이다. 쓰지만 마실 수밖에 없는 희망의 잔, 용기의 잔, 다시 일어서는 잔, 온 힘을 다해 지금 이곳을 견디는, 다시 태어나는 불의 잔이다.

보름이 넘게 퍼붓던 눈이 그친 오늘 새벽, 신문을 가져오려고 현관문을 열자 눈 그친 하늘에 소주잔 닮은 달 떠 있다. 그 주위에는 수많은 별들이 안주처럼 반짝거린다. 차가운 공기가 전신으로 퍼지면서 휘청, 넘어질 뻔했다. 숫눈같이 부드러운 그분께서 어느덧 다가와 힘껏 어깨를 부여잡는다. "자, 흔들릴 때마다 한 잔!"

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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