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잘리고 만들어 실감 … 게임하다 운 취준생도 있대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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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호 11면

“너무 힘들어요. 20번 넘게 떨어졌는데 아직도 인턴과 계약직만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미생들의 게임 ‘내 꿈은 정규직’ 개발자 이진포

청년실업률 10.7%, 청년 취업자 5명 중 1명은 1년 이하 계약직인 시대. 안정적인 일자리를 꿈꾸는 청년이라면 누구라도 토해낼 법한 이 하소연은 사실 게임 리뷰다. 웃자고 시작했는데 울고 마는, 게임인 줄 알았는데 현실이라는 모바일 게임 ‘내 꿈은 정규직’ 얘기다. 안드로이드용으로 지난 3월 말 출시한 지 한 달 만에 55만 건을 넘는 다운로드가 이어졌다.

‘내 꿈은 정규직’은 제목부터 극사실적이다. 개발자의 설명에 따르면 ‘돈도 없고 연줄도 없는 주인공을 인턴 신입사원부터 키워 사장까지 승진시키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서바이벌인 이유는 면접 탈락은 다반사고, 간신히 입사해도 시도 때도 없이 수십 가지 이유로 잘리기 때문이다. 파리 목숨 같은 게임 속 직장인의 처지에 “현실과 똑같다”는 호응이 쏟아진다. 그래서 “재미있다”는 게임 리뷰엔 꼭 이런 말이 덧붙는다. ‘슬프고 서럽고 울컥한다고’.

게임이다 보니 다소 과장된 설정이나 연출은 있지만 얼토당토않다고 할 수는 없다. 개발자가 직접 직장생활을 경험하고 잘려도 본 뒤에 만들었기 때문이다.

김춘식 기자

개발자인 이진포(29·사진)씨는 지난해 말까지 게임회사 직원이었다.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후 2010년 첫 직장에 들어갔다. 이후 4년간 세 곳의 회사를 다녔다. 지난해 12월 31일은 그의 마지막 출근이었다. 다니던 회사가 망해버린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내가 안정적으로 다닐 만한 자리는 없는 걸까.”

절망과 한탄 속에 내뱉은 한마디는 게임의 단초가 됐다. 재취업하는 대신 자신의 꿈을 게임으로 만든 것이다.

“미생에서 완생까지 현실에서 못다한 그 꿈을 게임에서 이뤄보세요!” 게임 사용자들에게 건넨 말은 사실 이씨 자신을 위한 이야기였던 셈이다. 정보기술(IT) 벤처기업이 즐비한 구로디지털단지에서 그를 만났다.

잘려 본 개발자가 만든 잘리는 게임
-반응이 좋다.
“원래 예상한 주 사용자는 20~30대였다.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공감하는 걸 원했다. 그런데 의외로 다양한 연령층이 게임을 하면서 엇갈린 반응이 온다. 취업준비생은 게임하다 울었다는데, 초·중·고생들은 현실성이 없다고 한다. 나이 드신 분들도 이렇게까지 힘드냐는 반응이다. 누군가 ‘말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고 리뷰를 올렸더니 ‘너, 회사 안 다녀봤지’라는 댓글이 붙었다.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는 현실을 서로 나누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어떻게 구상했나.
“내 꿈이 정규직이었다. 내 꿈 그대로 만들었다. 게임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다음엔 취재를 했다. 또래 친구라든가, 같이 일했던 동료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그 와중에 ‘중규직’이라고 계약직을 4년으로 늘리는 걸 검토한다는 뉴스도 나오고…. 힘들고 고달픈 취업과 직장생활의 소재는 넘쳤다. 걸러내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게임은 무차별적인 탈락과 해고, 평가와 시험의 연속이다. 이씨는 생생한 묘사로 구구절절한 직장인의 애환을 녹여냈다.

예닐곱 번 이상 면접을 본 끝에 간신히 입사하면 게임 화면에 사무실이 나타난다. 인턴사원인 주인공 위로 계약직·정규직·대리·과장·차장·부장·이사·상무·전무·부사장·사장이 층층시하로 앉아 있다. 갑(甲)이라는 글자가 쓰인 사장의 책상은 대체로 비어 있지만, 사장이 가끔 등장하면 모든 직급이 활활 불을 태우며 일을 처리한다.

승진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내가 인턴 때는 말이야, 회사에서 밥만 줘도 감사합니다 하고 다녔어. 자네는 열정이 있나?’ ‘전무님이 재미없는 개그를 시도했다. 까르륵 웃을까, 정색할까’ 같은 것들이다. 물론 각각 ‘인턴의 열정으로 버틸 수 있습니다!’ ‘까르륵~ 너무 재밌네요 ^0^’가 정답이다.

이렇게 잘해도 해고는 난데없이 들이닥친다. 부르는 데 대답을 안 해서, 서류에 0을 하나 더 넣어서, 퇴근시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남들 짜장면 먹을 때 혼자 탕수육을 주문했다고도 잘린다. 그야말로 ‘웃픈(웃기면서 슬픈)’ 해고 사유들이다. 여간해선 중도 탈락이니 사용자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제발 좀 쉽게 해달라고, 버티기 힘들다고.

-게임이 너무 어렵다고 한다. 면접 통과만이라도 쉽게 해달라는데.
“첫 면접 통과 확률은 0%다. 횟수가 많아질수록 확률은 높아진다. 면접 노하우가 쌓이는 거다. 승진 확률은 직급이 높을수록 낮게 했다. 취업준비생이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사장까지 올라가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될지 생각해봐라. 게임이 어렵다는데 회사 다니는 것보다는 쉬울 것 같다. 현실에선 이력서 100군데 넣어도 면접 제의 한 번 못 받는 경우가 수두룩한데, 게임에선 일단 면접은 볼 수 있으니까.”

그의 설명대로 게임의 설정은 지난해 여러 기관이 발표한 취업·직장생활의 현실과 겹친다. 채용정보 전문업체 리크루트 조사에 따르면 취업준비생의 평균 입사지원 횟수는 1인 평균 19.7회였다. 한국고용정보원은 첫 취업 후 3년 내 이직·실직하는 비율이 63.1%라고 발표했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는 대졸 신입 1000명 중 18명이 부장으로, 단 5명이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62번 탈락·실직 끝에 부장을 달았다는 게임 사용자의 후기는 현실에 내놓아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험난한 사장의 길 끝엔 비밀 엔딩이
‘내 꿈은 정규직’은 무료 게임이다. 아이템 판매와 광고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데 그 설정마저 리얼하다. 이씨는 사용자에게 ‘스펙’을 판다. ‘스펙업’ 메뉴를 통해 결제하면 업무 능력이 높아지거나, 체력이 좋아지거나, ‘말발’이 세져 승진을 당길 수 있다. 광고는 ‘알바’ 메뉴를 통해 보게 만든다. 사용자들이 ‘알바’ 메뉴를 클릭해 광고를 보면 게임 머니를 주는 것이다. “회사 다니면서 월급만 받아서는 먹고살기 힘들겠다”고 느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게임 속 직장인도 알바를 뛰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생긴 게임 머니로는 어머니께 명품 가방 선물을 해드릴 수도 있고, 자동차를 뽑아 기분을 낼 수도 있다. 이런 이벤트들은 그가 “제대로 자리 잡으면 정말로 해보고 싶었던 것”이라고 했다.

사장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난하다. 가까스로 승진을 하면 그 직급에 맞는 또 다른 시험대에 오른다. 이씨는 대리부터 부하 직원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기능을 더했는데 여기선 동료와의 관계 등 직장인의 처세도 드러난다. 일만 열심히 하는 걸로는 부족한 직장생활의 복잡 미묘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승진하면 변수도 많아지더라.
“적당한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들을 한다. 일은 너무 잘해도 안 되고, 못해도 안 된다고. 그래서 지나치게 열혈 모드로 일을 해도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시킨다. 또 대리부터는 ‘부하 직원 갈굼’ 기능을 추가했는데, 부하를 닦달해서 일을 빨리 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면 돈을 더 많이 벌고 승진 확률도 높일 수 있지만 적당히 해야 한다. 자주 그랬다가는 파업이 벌어져 내가 잘릴 수도 있다.”

-직급과 관계없이 나름의 애로가 있다는 얘기인가.
“여러 회사에 다니면서 과장·차장을 봤는데 다 힘들었다. 게임 제목은 ‘내 꿈은 정규직’이지만 막상 정규직이 돼도 생각한 것만큼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게임 캐릭터도 직급이 높아지면 외모를 바꿔준다. 배 나오고, M자 탈모 생기고, 눈은 충혈된다. 그렇게 하루하루 사는 것 같다.”

-이렇게 힘들면 대체 사장이 될 수는 있나.
“생각보다 빨리 사장이 됐다는 연락이 왔다. 밤새 게임을 했다고 하더라. 회사에서 퇴근하고 게임으로 출근했다고.”

-사장이 되면 좋은 게 뭔가.
“만들어 놓은 비밀 엔딩이 있다. 사장은 대부분의 직장인이 원하지만 살면서 해보기 어려운 일을 할 수 있게 했다. 나도 회사 다니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거다.”
그가 비공개를 전제로 털어놓은 반전 엔딩은 과연 무릎을 탁 칠 만한 ‘직장인의 꿈’이었다.

-게임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게 있나.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게 있다. 취업이 안 돼도 ‘원래 힘들잖아’, 직장에서 잘리고 회사를 옮겨도 ‘원래 힘들잖아’라고들 말했다. 현실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거다. 사람들이 ‘원래’가 아니라 ‘왜’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게임 주인공이 잘려나가는 걸 보면서 왜 잘릴 수밖에 없는지 한 번쯤 의문을 가져본다면 게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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