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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의 핏빛 그림들 일본인과 슬픔 나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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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광주의 기억에서 동아시아의 평화로’전에 선보인 ‘민중의 싸움’. ‘광주자유미술인회’가 1983년 공동제작한 8m 길이의 대형 채색화다.

"국군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자국의 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4반 세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반발한 광주시민에게 전두환은 2만 명의 군을 투입해서 피의 탄압을 가했고요. 군부의 철저한 보도통제로 사람들은 소문으로 사건의 진상을 추측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때, 광주의 젊은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예술을 버리고 '모든 그림은 포스터로, 모든 시는 슬로건으로'를 표어로 진실을 고발하는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13일 오후 일본 교토시립미술관 전시장에 모인 관람객은 한국에서 온 미술가 홍성담(50)씨가 털어놓는 25년 전 얘기에 귀기울였다. 그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에서 진실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문화선전대 구실을 했던 '광주자유미술인회'의 중심 인물이다. 2005 한.일 우정의 해를 뜻깊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교토시민문화연대는 '광주자유미술인회'를 초청해 기획전'광주의 기억으로부터 동아시아의 평화로'를 마련했다. 개막식 축사를 끝내며 홍씨는 "광주민주항쟁의 진실과 함께 미래를 향한 희망을 제시해 준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의 인간상이 교토 시민 여러분에게 전해지길 바란다"고 인사했다.

25일까지 이어지는 '광주의 기억으로부터…'는 한국 민중미술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광주 미술 지하조직의 전모를 일본에 처음 소개하는 자리다. 홍성담.천현로.정영창.전정호.박광수.홍성민.이상호.전상보.백은일 9명이 목판이 닳아 구멍이 나도록 밀어내 뿌렸던 판화와 회화 100여 점, 공동작업한 대형 걸개그림과 포스터 40여 점이 선보였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진실을 전하려 노력했던 광주의 문화패 활동 가운데 사람들 마음을 가장 격렬하게 움직인 것은 광주 시민의 분노와 슬픔을 새긴 판화와 걸개그림이었음을 전시회는 보여준다.

교토 전시장에서 관람객의 뜨거운 호응을 받고 돌아왔다는 홍성담씨는 "그 뜻과 가치를 이웃 일본이나 독일 등 다른 나라에서 먼저 평가하는 마당에 한국 민중미술의 성과물과 자료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할 미술관 설립이 시급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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