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칼럼] 퇴직금으로 빚을 갚겠다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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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객원기자

재산리모델링 상담을 하다 보면 퇴직 전에 은행 대출금을 갚고 노후로 넘어가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퇴직 후엔 소득이 줄기 때문에 부채 상환이 적지 않은 부담이 돼서다. 심지어 퇴직금으로 남아 있는 대출금을 몽땅 갚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부채를 대하는 퇴직자들의 일반적 정서다. 하지만 과연 빚을 완전히 꺼버리는 게 능사일까.

사실 퇴직을 앞둔 우리나라 50대는 짊어진 빚이 많긴 많다. 한국개발연구원(KDI)가 지난 해 12월 발표한 '가계부채의 연령별 구성변화'라는 보고서에서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40~50대 가구주에 집중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2013년 말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약 80%로 10년 전인 지난 2004년의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2013년 한국과 2004년 미국의 가구주 연령대별 가계부채 분포를 비교해 보면 한국은 50대 가구가 전체 가계부채의 35%를 보유해 미국(22%)보다 훨씬 높았다.

우리나라의 가구당 평균 부채는 약 5994만원이다. 연령대별로 보면 30대 5235만원에서 50대엔 7911만원으로 급증한다. 경제활동의 절정기인 50대는 전 생애에서 소득이 가장 높은 시기로 빚이 늘어나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퇴직 전후에 노후생활에 대한 걱정이 일기 시작하면서 빚 상환이 속도를 낸다. 60대 이상의 평균 부채가 4372만원으로 50대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만큼 퇴직자들이 빚을 열심히 갚았고 신규 수요도 억제되고 있다는 뜻이다. 회사에서 퇴직자에게 주는 퇴직금을 연금으로 전환하지 않고 일시금으로 타는 비율이 92%나 되는데, 이중 상당수는 빚 갚는 데 쓰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빚이 약이 되려면

빚은 가급적 지지 않는 게 좋다. 빚이 있다면 우선적으로 이를 갚는 게 가계자산운용의 원칙이다. 그러나 이 말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일 뿐이다. 현실은 빚을 쓰지 않고선 꼭 필요한 일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자주 있다. 예컨대 요즘처럼 전셋값이 뜀박질을 하는 상황에선 내 집이 없는 사람은 은행대출을 받아 아파트 한 칸이라도 장만하고 싶을 것이다. 빚을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묶어 둘 수 있다면 빚의 과다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빚 갚을 능력이 중요한 것이다. 보통 은행대출금이나 카드 빚 등 부채가 전체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0% 이상만 되지 않으면 상환능력이 있는 것으로 본다.

게다가 요즘 은행금리가 1%대에서 맴도는 초저금리 시대 아닌가. 부채상환 부담이 과거보단 훨씬 줄어 든 건 초저금리의 축복이다. 은행대출을 일으켜 투자에 나서는 '레버리지(지렛대)투자'도 부활했다. 우리나라 은행대출의 90%는 주택담보대출이라고 한다. 투자원금에 부채를 얹으면 덩치 큰 부동산도 얼마든지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다. 요즘 금리가 2%대인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수익률 5%짜리 오피스텔을 사기만 해도 단순계산으로 연 2% 포인트 이상의 수지차를 따먹는다. 레버리지 투자를 한 뒤 가격이 오르면 시세차익이란 덤까지 생긴다. 물론 반대로 가격이나 임대료가 떨어지면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레버리지 투자 때 위험관리를 항상 신경써야 하는 이유다.

저금리 시대엔 빚을 상환할 때도 테크닉이 요구된다. 무작정 갚아 버리지 말고 요모 조모 잘 따져 상환하는 자체가 재테크 기술이란 이야기다. 이런 면에서 퇴직금으로 빚을 일괄 상환하는 건 재고해 볼 일이다. 퇴직후의 생활이 불안정해진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괜히 무리하게 퇴직금을 빚 상환에 사용할 필요는 없다. 매달 조금씩 갚는 대출금 상환이 크게 부담이 안된다면,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계속 갚아나가는 편이 낫다. 재취업을 해 고정수입이 생긴다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퇴직후엔 예기치 못하게 목돈을 쓸 데가 의외로 많이 생긴다. 대표적인 것이 병으로 인한 장기 입원으로 고액 지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쪽이 퇴직금의 사용처로서 더 어울리는 건 이쪽이다. 주택 리모델링이나 재건축, 이사등의 이슈가 생길 경우엔 갚아 버린 빚이 아쉬워 질 수 있다.

고정금리 대출로 갈아타기

일부에선 현 금리수준이 바닥 수준으로 앞으로 오를 가능성이 크다며 빚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금융권에선 한국은행 기준 금리 1.5~1.75%를 역사적 바닥권으로 보고 있다. 금리인상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미국은 금리를 하반기에 올릴지 모른다는 신호를 보내는 상황이다. 미국의 금리인상은 전세계적인 금리인상 도미노를 부를 게 확실시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1%대 후반부인 대 금리가 하루 아침에 1% 포인트 이상 급등하는 험악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금리 상승폭이 단기간에 100%가까이 되는 것은 정상적인 경제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경제적 충격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 국은 과격한 금리인상을 자제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물론 금리인상에 대비해 대출 구조를 바꾸는 작업은 필요해 보인다. 예를 들면 주택담보대출을 장기 고정금리에다 원리금 동시 분할상환하는 '적격 대출'로 갈아타는 것이다. 은행의 주택대출금리는 최저 2% 중후반대도 있으므로 기존 대출이 3%대 이상의 금리를 받았다면 적극적으로 적격대출 갈아타기를 시도해 볼만 하다. 만약 한국은행이 기준 금리를 올린다면 고정금리 대출을 받아둔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큰 돈을 버는 효과를 보게 된다.

서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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