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기생충과 진화의 함수관계] 4. 숙주와 共生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8면

기생충에 감염된 많은 생명체(숙주)들은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

배추흰나비의 애벌레는 기생충인 나나니벌 새끼들에게 몸속을 갉아먹히다 새끼들이 커 몸을 뚫고 나오면 죽고 만다.

또 어떤 종류의 촌충을 지닌 아메리카 사향소는 허파가 약해져 잘 뛰지 못하기 때문에 늑대에게 쉽게 잡아먹힌다.

그러나 이렇게 숙주가 죽는 경우는 ▶기생충이 다 자라 더 이상 숙주의 몸 안에서 살 필요가 없어졌거나 ▶육식 동물에게 잡아 먹히게 해서 기생충이 그 육식 동물(포식자)에게 옮겨 가기 위해서다. 촌충에 감염된 사향소를 늑대가 먹으면 촌충은 늑대 몸 속에서 성충으로 자라난다.

이와는 달리 만일 기생충이 숙주의 몸 안에서 대를 잇기까지 하며 오래도록 살아야 한다면, 숙주가 만수무강해야 기생충도 장수할 수 있다.

실제 자연 속에서는 숙주와 기생충이 조금씩 양보(?)해 사이좋게 살아가는 경우들이 있다.

나방들은 가슴에 귀가 있고, 이 안에는 작은 진드기 종류가 산다. 진드기들에게는 규칙이 있다. 안쪽 귀까지 침입해 완전히 귀가 먹게 하는 종류는 반드시 왼쪽이나 오른쪽 중 한쪽 귀에만 산다.

그렇지 않고 바깥 귀에만 사는 진드기들은 양쪽 귀에 다 있다. 어느 경우든 나방이 완전히 귀가 멀게 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나방의 청각이 생존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나방은 천적인 박쥐가 내는 초음파를 듣고 피한다. 귀가 멀면 박쥐가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해 잡아먹힌다.

그리 되면 기생하는 진드기도 끝이다. 이 때문에 서로의 생존을 위해 진드기는 나방이 최소한의 청각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바다에 사는 갑각류 중에는 도미의 입속에 기생하는 놈이 있다. 우선 도미의 입에 들어가서는 혀에서 피를 빨아먹고 자란다. 혈액이 빠져나가며 도미의 혀는 오그라든다. 이대로라면 도미는 혀로 먹이를 삼킬 수 없어 죽고 만다.

이때부터 갑각류가 자선가 행세를 한다. 다리로 도미의 남은 혀를 움켜쥐고서는 자신의 몸이 도미의 진짜 혀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도미는 먹이를 섭취하며 생명을 유지하고, 갑각류는 도미의 먹이 일부를 얻어먹는다.

완전한 '공존'은 아니지만, 숙주가 특정한 포식자는 피하도록 하는 기생충도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에드워드 레브리(자연과학부) 교수는 흡충에 감염된 달팽이들의 행동을 연구했다. 보통 달팽이들은 자신을 잡아먹는 물고기들이 주변에 많아져도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데, 감염된 달팽이는 물고기가 많아지면 바위 틈 등으로 천천히 몸을 숨겼다.

반면 똑같은 포식자라도 물새들이 나타나면 오히려 '날 잡아 잡수'하는 식으로 바위 위에 올라가 한참을 있었다.

레브리 교수는 논문에서 "이 흡충은 물새로 옮겨가 성충이 된다"면서 "달팽이가 물고기는 피하고 물새에게는 눈에 띄도록 하면 기생충이 더 잘 번식하게 된다"고 말했다. 결국 달팽이는 기생충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기생충에 걸리면 불임이 되는 경우도 많다. 과학자들은 이것도 숙주의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기생충의 전략으로 해석한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짝짓기에 열중하는 동안 무방비 상태가 돼 잡아먹히기 일쑤인데 불임이 되면 이런 위험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또 짝짓기 할 시간에 먹이를 더 찾아다닐 테고, 번식에 쓸 영양분과 에너지가 남아 기생충의 입장에서는 뺏어먹을 거리가 많아진다는 것도 숙주를 불임으로 만들어서 생기는 이로움이다.

그러나 불임이 된 숙주들의 평균 수명이 더 길어질 것이라는 등은 추측일 뿐, 아직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입증되지는 않았다.

권혁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