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027>|제 80화 한일합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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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일양국수뇌는 불과 1주일을 사이에 두고 똑같이 이색적인 인물을 외무장관에 임명해 큰 화재를 불러 일으켰다.
「사또」(좌등영작)씨와「후지야마」(등산애일랑) 전 외상의 도전을 물리치고 자민당총재에 3선한「이께다」수상은 64년7월18일 내각개편을 통해 공론과는 전혀다른 의외의 인물 「시이나」전 통산상을 외상에 기용했던 것이다.
조각하마론에 통산상으로 가장유력하다고 거론된 그가 외상이될 줄은 누구도 예축지못해 의표를 찌른 인사라는 평을 낳았다.
그런 때문이었을까.
개각 이튿날「야마모또」(산본중신)통산성 사무차관이 의외의 인사에 어리둥절해 있는 외무성을 방문해『통산성의 대 선배인 「시이나」대신을 잘 부탁한다』는 이례적인 인사를 하는 일화를 남겼다고 한다.
선배에 대한 후배의 깍둣한 배려의 뜻이겠으나 다른 말로는 그의 외상취임에 대해 통산성 후배들이 불안했다는 뜻이기도하다.
그렇다면 「이께다」수상이 외교에 문외한인「시이나」씨를 외상에 기용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시이나」회고록에 따르면「이께다」수상은 그의 참모장인 「마에오」(전미번삼랑)씨의 제언에 따라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이께다」수상은 한일관계정상화에 신중한 자세를 견지해왔다.
미일안보파동으로 「기시」내각이 도피한 전철을 늘 염두에 두고 한일관계 타결이 제2의 미일안보파동으로 진전되지 않도록 조심성있게 처신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이께다」수상도 월남전의 확전양상과 그에 따른 미국의 한일관계 정상화에 대한 강력한 촉구등의 사태진전에따라 적극적으로 한일관계정상화를 공약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일회담을 타결하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협상도 물론 중요하지만 한일회담 타결과 관련해 이해관계를가진 내각의 법무·대장·농림·통산·군수·문부성과의 내부적 협조를 원만히 하는 것도 외교에 못지 않게 중요했다.
따라서 외상은 사실상 이들 대신들을 요리할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는데 적임자가「시이나」씨 였다는 것이다.
「이께다」수상은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고도의 계산을 했던 것으로 볼수 있는데 정작 한국에서는『보다 젊고 적극적인 인물이었더라면…』하는 실망의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나는 듣고있다.
이동원 외무장관이나 「시이나」외상도 다같이 굴욕외교 또는 저자세외교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속셈은 전혀 반대인 한일양국의 반대세력의 격렬한 저항분위기에서 그들 수뇌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장관직에 취임한점은 용기있는 행동으로 높이 평가할만 하다.
이장관으로서는 한일관계정상화에 성공해도 굴욕외교,매국노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실패한다면 책임을 지고 장관직을 물러나야할뿐 아니라 모멸의 대상이 된다는것이 당시의 솔직한 분위기가 아니였는가.
「시이나」외상도 관료의 자세에서 봐도 무리하게 서두르지 않는다는 신중론이 1백번 나온 일이고 또 국회를 상대해서도 한국문제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것이 정치가로서 현명한 보신책이었을 것이다.
「시이나」회고록에 따르면 『이같은 환경에서 시기를 늦추지 않고 결단을 내린 양측의 용기있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한일회담은 성취됐던것』이라고 평했다.
물론「시이나」씨의 공을 높이평가하고 싶었던 그의 추종자들이 펴낸 회고록의 평가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한일관계정상화에 총대를 맨 그들의 용기와 노고,그리고 집념은 사야할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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