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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진화하는 호모 아카데미쿠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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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호 24면

자고로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험 기간이 닥치고, 엄마의 잔소리가 들려와야 책을 집어드는 것이 자연스런 풍경이랄까.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공자님 심경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나의 기쁨과 행복은 다른 곳에 존재했다. 허나 최근 베스트셀러 순위를 장악한 도서 목록을 보면 분위기가 사뭇 다른 듯 하다. 지적 대화를 위한 입문법부터 반복 학습 공부법까지 열혈 수험생에게나 어울릴 법한 책들이 넘쳐나니 말이다. 공부하는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의 시대가 돌아왔다. 중앙 SUNDAY는 이 봄 서점가를 장악한 5인의 저자를 전화 및 e메일로 만났다.

서점가에 글쓰기·교양·인문서 열풍

지적 대화 위한 최소한의 지식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한빛비즈)이라는 다소 야릇한 제목이 세간에 화제가 되기 시작한 건 지난 1월부터다. 역사ㆍ경제ㆍ정치ㆍ사회ㆍ윤리를 폭넓게 다뤘다니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학창 시절 눈이 빠지게 들여다봤던 교양 서적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채사장’이라는 필명도 썩 믿음직스럽진 않았다. 들어본 적 없는 무명의 작가가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할까 싶었다.

하지만 서른 넷 청년이 던지는 화두는 제법 진지했다. “교양은 클래식을 들으며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그 무엇이 아니다. 교양과 인문학은 단적으로 말해서 넓고 얕은 지식을 의미한다.”

저자에게 직접 묻자 보다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깊고 좁은 지식을 갖고 있어요. 의사도 그렇고, 휴대전화 판매원도 마찬가지고 그 분야에서는 가장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그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대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유하고 있는 공통분모가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들이 대화놀이를 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지식을 나누고자 했던 겁니다.”

시장은 빠르게 반응했다. 출간 3주만에 10위권에 진입하더니 석달 간 상위권에 랭크돼 있다. 이어서 나온『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현실너머 편』(철학ㆍ과학ㆍ예술ㆍ종교ㆍ신비)도 바로 10위권에 안착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어렵지 않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저자는 보수와 진보의 궁극적인 차이는 세금에 있다고 봤다. 보수는 세금을 낮추고 복지도 줄이려는 방향성을 갖고, 시장은 자유를 추구한다. 이에 공산주의는 세금이 100%에 가까운 대신 모든 것이 복지이고,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한국ㆍ미국ㆍ일본의 경우 25%의 세율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정치를 경제로 푸는 데 그치지 않고 축구경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보수 팀은 다국적기업ㆍ대기업ㆍ중소기업이 공격수로 뛰고 목소리 크고 잘생긴 보수 미디어가 수비수로 힘을 더하지만, 빨간색 진보 팀은 선수가 1000명에 달해도 하나같이 말도 안 되게 작고 왜소하다는 식이다.

물론 지나친 단순화에 대한 우려도 있다. 저자 역시 이를 인정했다. 채사장은 “복잡한 개념을 2~3문장으로 전달하다 보니 다소 폭력적으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며 “다만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연결되어 있는가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세부 개념은 복잡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이는 그가 책을 쓴 이유와도 연관이 있다. 2011년 당한 교통사고로 큰 불안감에 빠진 그는 “내가 발 딛고 선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컸다”고 했다. 그래야 그 세계에 속한 나를 이해할 수 있고 다시 세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정치나 철학을 논할 때 자꾸 싸우는 이유는 아무도 어휘를 정리해주지 않아서 아닐까요?”

그렇다. 하나의 단어를 보고 있지만 각기 다른 해석으로 소통이 단절된 사회. 어쩌면 독자들은 ‘필수 영단어’보다 절실했던 ‘필수 사회 단어’의 등장이 반가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명문대생에게서 엿보는 학습법
지적 대화가 학습욕에 불을 지폈다면 불씨를 키운 것은 『하버드 새벽 4시 반』(라이스메이커)과 『7번 읽기 공부법』(위즈덤하우스)이다. 『하버드 새벽 4시 반』은 지난 연말에 출간돼 1달 만에 15위로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7번 읽기 공부법』은 나온지 1주일 만에 8위로 진입했다. 현재는 2~4위를 다투며 굳히기 경쟁에 나선 상태다.

두 책은 공히 세계의 명문대학을 다뤘다. 중국 저자 웨이슈잉(韋秀英)은 하버드 교수와 학생들의 일화를 발굴해 책으로 엮었다. 웨이는 “우연히 인터넷으로 본 영국 방송사가 만든 ‘하버드 새벽 4시 반’이라는 프로그램의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다”며 “도서관 불은 모두 환하게 켜져 있고 빈 자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식당과 보건실에서도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학생 한 명 한 명이 움직이는 도서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리스크가 적은 생산이 배움이라고 설파한다. 하버드 MBA 수업에 종종 등장하는 미국 자동차 회사인 포드사 일화를 소개하며 하버드의 성공비결을 요약한다. 다들 신개발 모터의 고장 원인을 알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회로기판 위에 선을 하나 그린 전기공학자가 1만 달러를 청구한 것. 선을 그린 가격 1달러,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 아는 것에 대한 대가가 9999달러였다. 저자는 “나 역시 하버드 출신은 아니지만 그들이 가진 의지와 정신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타인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하나의 본보기이자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7번 읽기 공부법』은 도쿄대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재학 중 사법고시와 국가공무원 제 1종 시험을 차례로 합격한 변호사 야마구치 마유(山口眞由)가 본인의 학습법을 직접 소개한다. “어떻게 공부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저자가 “7번 읽으면 대부분 외워져서”라고 답했던 게 유래가 됐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늘 완벽하게 이해가 될 때까지 입력(input)을 반복했던 것이다. 마치 어릴 적 엄마가 읽어주던 동화책을 자연스레 외웠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300 페이지 분량을 30분 안에 읽을 만큼 빠른 통독을 권한다. 대신 매회 사이에 시간을 두지 않고 연속해서 읽을 것을 주문한다. 첫 번째는 표제를 머릿속 노트에 옮기듯이 읽고, 두 번째는 책 전체의 순서와 구조를 중심으로, 세 번째는 줄거리를 명확하게 만드는 식이다. 야마구치는 “이 학습법에 필요한 건 오직 향상심뿐”이라며 “과거의 나와 비교했을 때 현재의 내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면 누구나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7번 공부법’은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됐다. 말하기와 쓰기에 소질이 있는 출력형(output) 인간이 아니었던 그녀는 메일을 보낼 때도, 법조문을 쓸 때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지금은 영어로 나를 표현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어요.”

이른바 성인층에도 통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학습의 공간을 학교로 제한하지 않은 것이다. 위즈덤하우스 이부연 분사장은 “학부모가 청소년 자녀를 위해 구입할 줄 알았는데 40대가 직접 사 보는 경우가 더 많아서 놀랐다”며 “최근 몇 년 동안 자기계발서 판매량이 주춤했는데 공부법이나 말하기, 글쓰기 등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분야에 대한 조언이 적중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웨이슈잉 역시 “직장에 다니면서 배우는 샐러던트가 많아진 것도 한 몫 했다”며 “이렇게 빨리 달라지는 세상에서 배우지 않으면 내일을 만들어가기 위한 참여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커뮤니케이션은 인문학의 최종집결지
셀러브리티의 책도 눈에 띈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생각의 길)은 아예 저자가 30년 동안 글쟁이로 배우고 익힌 ‘영업기밀’을 공개한다. 첫째, 취향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대한민국 최고 미남은 장동건이다’ 같은 고백은 모두가 참이라고 인정하는 명제가 아니므로 미남의 기준을 제시하거나 과학적 근거를 밝혀 논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같은 책을 집필한 이유에 대해 저자는 “세상이 글쓰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동안 정치 활동을 후원해준 시민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지난해 ‘청소년과 학부모를 위한 무료 논술특강’을 진행했는데 성인 청중이 절반에 달하는 모습을 보고 글쓰기가 학생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가 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이고 다른 하나는 그로 인한 소통의 패러다임 변화다. 저자는 “무선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글의 유통을 방해하는 장벽이 사라졌다. 글쓰는 능력이 있다면 누구나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어디든 자기 글을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상생활에서는 친구들과 SNS로 소통하고 기업에서도 메신저나 메일로 업무 내용을 주고받는 비중이 커지면서 생활 안에서 글쓰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글쓰기 특강 논술시험편을 준비 중이다.

『대화의 신』(위즈덤하우스)는 22년 전에 쓰여진 고전이지만 비슷한 예측을 내놓았다. CNN의 간판 토크쇼 앵커로 활약했던 래리 킹은 “정보 초고속도로는 벌써 우리의 현실 속에 자리잡고 있고, 지금 상황은 이미 존재하는 통신망에 추가 선로를 설치하는 것”이라며 “새로운 대화 장비 때문에 대화는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내에서만 네 번째 재출간된 사실 자체가 원제(How to Talk to Anyone, Anytime, Anywhere)처럼 시간과 장소, 대상을 불문하고 훌륭한 대화를 꿈꾸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이 아닐까.

학습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 출판계를 보는 전문가들의 시각은 어떨까. 한양대 국문과 유성호 교수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커뮤니케이션은 인문학의 최종 집결지”라고 표현했다. 말하기와 글쓰기가 대입과 취업 시장 트렌드로 자리잡은 것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잘 하는 엔지니어를 요구할 만큼 우리 사회의 기대치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교보문고 브랜드관리팀 진영균 대리는 “여러 창구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해야 하는 자기 표출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표현 수단인 말과 글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길 내용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복합적인 수요가 형성된 것 같다”고 말했다. 짧아져 가는 봄날을 충실히 즐기려면 한 권쯤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듯 하다.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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