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은 장부에 맹탕 수사 우려, 검찰 내부서도 특검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24호 05면

성완종 전 경남그룹 회장이 지난 9일 자살하면서 남긴 55자(字)의 메모. 로비 대상 8인의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된 지 열흘 만인 지난 20일, 메모 맨 끝에 이름이 적혀 있던 이완구 국무총리가 사의를 표명했다. 성 전 회장이 2013년 4월 재·보궐선거 선거자금 3000만원을 건넸다고 폭로한 데 대해 이 총리가 ‘결백’을 주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24일 갤럽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84%가 “대부분 사실일 것”이라고 믿는 ‘다잉 메시지(dying message)’ 효과가 나타났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 문무일 특별수사팀 출범 2주

그런 가운데 지난 12일 출범한 특별수사팀(팀장 문무일 대전지검장)은 2주 만에 벽에 부딪혔다. 성 전 회장과 동생·장남의 자택 등 20여 곳을 압수수색했지만 비밀 로비 장부를 찾지 못하면서다. 성 전 회장과 8일 밤 최후 대책회의를 했던 최측근 두 명도 “리스트 내용이나 장부의 존재에 대해선 모른다”며 입을 맞추고 있다. 이에 수사팀은 25일 증거인멸 혐의로 박준호(49) 전 경남기업 상무를 구속하고 이용기(43) 홍보팀장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 내부에선 “이대로 가다간 8인 중 한두 명도 재판정에 세우기 힘들 것”이란 위기론도 나온다.

성 전 회장은 검찰이 경남기업 자원개발 비리 의혹 수사에 공식 착수하기 이전부터 리스트 폭로를 준비했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다. 수행비서 금모(34)씨는 “성 전 회장이 지난 2월 박근혜 대통령이 2006년 독일을 방문한 기사를 스크랩해 달라고 지시해 사진을 중심으로 출력해 줬다”며 “당시 출력한 기사를 파일로 메일함에 보관한 게 2월 14일”이라고 밝혔다.

성완종, 두 달 전 ‘메모 속 8인’ 선별
수사팀은 성 전 회장이 리스트 내용을 폭로하기 위해 준비한 정황이 담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와 e메일 기록을 복원했다고 한다. 검찰 관계자는 “성 전 회장이 검찰 인맥 등을 통해 지난해 말 경남기업 내사 사실을 안 뒤 수사 중단을 위한 ‘정치적 딜’을 하려고 올 2~3월에 리스트를 만든 것 같다”며 “구명 노력이 실패하자 복수의 최후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성 전 회장이 2012년 4월 국회의원이 된 뒤부터 빠짐없이 기록한 다이어리도 리스트 인사들과의 관계를 입증하는 자료가 됐다. 다이어리가 공개되면서 “재임 중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김기춘 전 비서실장),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이완구 총리) 등이 거짓말로 드러났다.

중앙일보와 JTBC가 확보한 2012년 4월~2015년 2월 다이어리에 따르면 김 전 실장은 재임 중이던 2013년 11월 6일 성 전 회장을 포함한 충청권 의원 5명과 만찬을 한 것을 포함해 재임 중 세 차례 접촉했다. 김 전 실장은 대선 직후인 2013년 1~4월에도 성 전 회장과 네 차례 만났다. 이에 김 전 실장은 “착각했던 것 같다. 만난 게 사실”이라고 말을 바꿨다.

김 전 실장은 ‘2006년 10만 달러 수수’ 의혹에 대해서도 “당시 초청자인 독일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이 항공료·숙박비를 제공해 여비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고 밝혔다가 거짓말 논란에 휩싸였다. 재단 측이 “서울 왕복 항공료는 제공하지 않았다”고 부인하자 김 전 실장 측은 “BC카드로 항공료 567만원을 결제했고 2006년 국회의원 정치후원금으로 충당했다”고 말을 바꿨다.

이완구·홍준표 수사 진척 없어
이 총리도 성 전 회장이 2013년 3000만원을 건넸다는 당일 4월 4일 다이어리에 ‘14:00 충남도청 개청식·신청사 광장’ ‘16:30 이완구/방문(유OO, 홍OO 등)’이라고 적어둔 것을 포함해 4년간 27차례 만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수사팀이 지난해 3월 이후 성 전 회장의 휴대전화 내역을 확인한 결과 성 전 회장 153회, 이 총리 64회 등 모두 217차례 전화를 주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당 대표 경선자금 1억원 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홍준표 경남지사는 “2011년 서산 지구당 간담회에서 만난 뒤 본 적이 없다”고 했으나, 2012년 9월 19일 ‘08:00 홍준표/롯데H 일식당’과 2014년 기록 등 두 번의 만남이 기록돼 있다. 홍 지사 측은 “만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사는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 총리와 홍 지사는 돈 전달 시기·장소·방법 등이 특정돼 수사가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윤승모(52) 전 경남기업 부사장 같은 핵심 증인 소환도 이뤄지지 않았다. 리스트에 등장한 다른 인사들에 대한 수사는 기약조차 없다. 김 전 실장은 2006년 당시 10만 달러(당시 환율로 9442만원)로는 정치자금법은 물론 뇌물죄 공소시효 7년을 넘겨 형사처벌이 불가능하다. 2012년 대선 당시 2억원을 받았다고 지목된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은 구체적인 시기·장소가 특정되지 않아 핵심 물증인 로비 장부가 확보돼야 수사의 돌파구가 열릴 수 있는 상황이다. 허태열 전 비서실장과 유정복 인천시장, 서병수 부산시장과 금액이 특정되지 않은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도 마찬가지다.

27일 귀국하는 박 대통령이 이 총리의 사표를 수리한 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요구한 특검을 수용할지 주목된다. 대검 핵심 관계자는 “국민적 의혹은 커져만 가고 핵심 물증은 안 보이는 상황에서 차라리 특검을 빨리 도입해 리스트 수사를 맡기는 것이 검찰 조직을 위해서도 나은 방안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특검을 수용하더라도 수사 대상을 8인으로 한정할지를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어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한영익·윤정민 기자 hany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