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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이 그리고 싶은 새 국제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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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 기자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 차이나랩 대표
[일러스트=김회룡]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지난해 가을 중국 상하이(上海)에 정부와 대학, 연구기관의 외교 전문가 30여 명이 모였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집권 이후의 중국 외교전략을 점검하는 자리였다. 이날 중국 외교의 문제점 중 하나로 새로운 개념이 너무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신형대국관계, 명운(命運)공동체, 아시아 신안보관, 일대일로(一帶一路)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올해 국제사회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신조어를 내놓았다. ‘신형(新型)국제관계’가 그것이다. 시진핑이 구두로 강조해오던 이 말이 지난달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에서 밝힌 정부업무보고에 처음으로 공식 포함되면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화권 언론은 올해가 시진핑이 세계 질서를 새롭게 그리는 원년(元年)이 될 것이란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시진핑이 말하는 신형국제관계란 무언가. 먼저 역대 중국 지도자의 국제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이 세상에서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봤다. 그는 아예 전쟁으로 평화를 유지하겠다(以戰保和)는 판단 아래 한국전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달랐다. 미국과 소련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에 큰 전쟁은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세계의 주된 흐름은 평화이며 중국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발전에 나서야 한다고 봤다. 지난 30여 년 동안 중국을 개혁개방의 길로 인도하게 된 사유다.

 시진핑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나. 오랜 세월 국제사회는 대국(大國)이 세력을 나눠 대치하고 작은 나라는 대국의 어느 한편에 줄을 서는 냉전(冷戰) 구도를 형성했다. 이후 소련의 해체와 함께 이 냉전 구도가 무너졌지만 적과 나를 구분하는 냉전의 사유는 계속되고 있다고 본다. 가상의 적을 상정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뭉치는 동맹(同盟) 체제가 아직도 남아 있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는 것이다.

 시진핑은 이젠 국제 질서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與時俱進)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 모든 나라가 운명 공동체라고 말한다.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본다. 새로운 국제 질서는 세계 각국 국민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협력(合作)과 윈윈을 핵심으로 하는 새 국제 질서’인 신형국제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 국제 질서 속에선 세계 어떤 국가든 그 크기나 강약, 빈부에 상관없이 모두 평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또 각국 국민은 자신이 선택한 발전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존중받아야 한다. ‘신발이 발에 맞고 안 맞고는 자신이 신어보면 제일 잘 안다(鞋子合不合脚 自己穿了才知道)’는 게 시진핑의 지론이다.

 미국이 자신의 가치관을 잣대로 세상을 재단해선 안 될 것이란 시사가 깔려 있다. 그렇다고 미국이 주도하는 현 체제를 뒤엎겠다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중국은 그럴 능력도 없으며 또 그럴 의사도 없다. 중국은 이미 세계 각국과 같은 배를 타고 있다. 그저 배가 정확한 방향으로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다. 중국이 바라는 건 현 질서의 일부 불합리한 점을 수정해 현 국제 체제를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란 이야기다.

 시진핑이 그리고 싶은 신형국제관계는 말 차원에 머무르는 게 아니다. 행동으로 돌입한 상태다. 일대일로 건설이 그 구체적인 예라고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말한다. 일대(一帶)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러시아로 뻗는 육상의 실크로드경제대, 일로(一路)는 동남아와 인도를 통해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이어지는 21세기 해상실크로드를 말한다. 관련 국가 인구는 세계의 63%에 해당하는 44억 명이나 된다. 자본 조달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 추진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자연히 일대일로는 올해 중국 외교의 최대 역점 사항이다. 왕이는 2015년 중국 외교의 키워드로 ‘하나의 중점 두 개의 노선(一個重點 兩個主線)’을 꼽았는데 하나의 중점이 바로 일대일로다. 두 개의 노선은 평화와 발전을 말한다. 중국이 일대일로 계획을 통해 구체화하려는 신형국제관계는 곧 세계 각국이 서로 상의하고 서로 건설에 나서 그 이익을 서로 공유하는 질서다. 사회주의 국가건 자본주의 국가건, 또 무슨 종교를 믿든 어떤 가치관을 갖든 상관없이 모두 협력해 상생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시진핑이 야심적으로 추진하는 이 같은 새 국제 질서 창출이 과연 가능할까. 과거 중국의 미래와 관련해선 낙관과 비관의 전망이 교차했다. 재미있는 건 낙관적 전망이 들어맞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반면 중국 붕괴론과 같은 ‘중국 때리기’ 성격의 비관적 예측은 과녁을 벗어나기 일쑤였다. 이번에도 조심스럽지만 낙관에 무게가 쏠린다. 왜? 영국 등 미국의 여러 우방이 AIIB 참여에 적극적이란 사실은 이미 미국 주도의 현 국제 질서만으론 문제를 풀 수 없어 수정을 요구한다는 증거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국제 질서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출렁인다. 중국이 진원지다. 그 변화가 좋든 싫든 우리로선 피할 길이 없다. 새롭게 넘실대는 그 물결을 최대한 타고 넘는 것이 요구될 뿐이다. 물을 거슬러 오르는 배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뒤로 밀리는 게(逆水行舟 不進則退) 세상 이치이기 때문이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