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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 천국인 줄 알았던 중국, 이젠 창업 천국"

중앙일보

입력

“한국에서라면 1년 걸려도 못할 일을 이곳에서 석 달 만에 끝냈습니다. 투자자가 나타나 계약도 맺었고 실리콘밸리로부터도 러브콜을 받고 있지요. 선전(深?)이 한국에선 짝퉁 천국으로 소문났는지 모르지만 제겐 창업 천국입니다.”

신생벤처기업(스타트업) BBB의 최재규(35) 대표는 손가락 끝에서 피 한 방울 뽑아 원격으로 건강 진단을 하는 모바일 장치를 개발중이다. 바이오 분야에서 10여 년간 쌓은 기술과 노하우를 무기로 지난해 10월 창업했다. 국내 한 창업지원기금의 문을 두드렸으나 보기 좋게 퇴짜 맞았다. 수소문 끝에 선전의 창업지원업체인 핵슬러레이터(HAX) 공모에 합격한 그는 올 1월 선전으로 건너왔다. 초기자금 10만달러와 함께 그에겐 실리콘밸리 출신의 베테랑 멘토들이 붙어 기술지원은 물론 디자인과 상품화 전략을 지도해 주고 있다.

세계 각지의 엔지니어들이 선전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미국 버클리대학 재학중 창업한 데이비드 루는 선전에 와 세계 최소형 대기질 측정장치를 개발했고 지난해 여러 펀드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받아냈다. 이처럼 '선전 드림'을 품고 엔지니어들이 모여들자 창업 보육·지원 업체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HAX와 하이웨이원 등의 업체들도 속속 선전으로 거점을 옮겨왔다.

한때 짝퉁천국으로 악명 높았던 선전이 창업천국으로 거듭난 비결은 무엇일까. 최근 시찰단을 꾸려 선전을 둘러본 한국의 벤처업계 관계자 25명은 완벽하게 갖춰진 하드웨어 생태계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30여년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해오는 동안 영세부품상과 조립ㆍ가공업체에서부터 첨단 기술을 갖춘 글로벌 업체까지 제조업 생태계가 한 도시 안에 구축된 것이다.

특히 없는 부품이 없다는 세계 최대의 전자시장인 화창베이(華强北)가 창업자들에게는 가장 큰 매력이다. 통신기술을 활용한 소방대원용 스마트헬멧을 개발중인 넥스시스의 엄정한 이사는 반나절을 둘러 본 뒤 “세운상가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다 못 구하던 부품 샘플을 반나절만에 다 구했는데 값도 터무니없이 싸다”며 혀를 내둘렀다. 화창베이엔 폭 1m 남짓한 매대에 전화기 한대, 계산기 한대 놓고 영업하는 부품상이 수 천명이다. 일명 ‘원미터 카운터’(一米拒臺)들이다. 이들은 선전 외곽에 종업원 수백 명의 부품 공장을 거느리고 있는 업주들이다.

하드웨어 업체 키위플러스의 정석원 기술담당은 “그들은 부품판매만 하는 게 아니다"며 "내가 개발중인 제품을 설명하자 바로 이튿날 자신의 거래업체이기도 한 폭스콘 관계자와 연결시켜 줬다"고 말했다. 폭스콘은 아이폰을 생산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옮겨온 HAX의 파트너 벤자민 조프는 "기술 및 제품개발은 선전에서, 마케팅은 미국에서 주로 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부품 조달뿐 아니라 금형ㆍ회로 제작을 거쳐 시제품 생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설계도만 가져가면 소량으로 시제품을 제작해 주는 전문 업체도 있다. 시디(?遞)과기의 주문 현황판에는 20개에서부터 100개 단위의 소량 주문들이 빼곡했다. 판하오(潘昊·32)대표는 “벤처기업의 성공 여부는 시제품을 얼마나 빠르게 잘 만들어 투자자를 확보하냐에 달렸다"며 "전세계 5만여명의 개발자로부터 주문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시찰단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즉석에서 주문 상담에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정부 자문위원이기도 한 컨설턴트 동우상씨는 "한국에선 제조공장들이 1000개 단위 이상의 대량생산이 아니면 주문을 안 받기 때문에 시제품 만들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2박3일간의 시찰단을 이끈 창업정보업체 플래텀의 조상래 대표는 “적어도 창업 분야에서만큼은 중국은 멀찌감치 우리를 앞서 있다”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이는 곧 기술력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전=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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